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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극단적 선택에서 내 삶의 위안을 얻는다는 것은

by 슈브

아침에 눈을 뜨면 스트레칭을 하고 이불 정리를 한다. 사실 그 전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은 핸드폰 알람을 끄면서 인스타그램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 웹 매거진 계정을 몇 개 팔로우하고 있으면 거의 항상 그 계정들 중 하나의 게시물이 가장 먼저 화면을 차지한다. 그 중 연예인, 정치인 등 유명인의 얼굴이 떡하니 보이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설마’하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에는 내가 중학생인 시절 데뷔해 개성있는 목소리와 스타일로 잘나가던 가수가 생을 마감했고 오늘은 항상 당당해 보이던 정치인이 집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을 보며 ‘설마’를 떠올리고 그 다음은 ‘아휴’하는 안타까움의 탄식이 이어진다. 그리고는 유명하든 잘나가든 누구나 각자의 힘듦을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역시 마음가짐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후 '그래 인생을 즐기며 성실히 살자'라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의 극단적 선택을 보며 내 삶의 위안을 얻고 다짐을 하는 것이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고인이 어떤 사람이었든 가족들과 주변 분들은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말이다. 크고 작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가치 있고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매우 흥미롭기까지 하다. 오늘 아침 접한 부고 기사도 이렇게 글로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모든 상황을 ‘나의 삶’과 ‘나의 성장’을 위한 연료로 사용한다면 단지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버리는건 아닐까 하는 염려가 생긴다. 가끔 영화를 보면서도 하나의 장면, 사운드에 집중해 그것이 숨겨놓은 의미를 쫓다가 영화 전체의 메시지와 재미를 놓쳐버리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의 극단적 선택을 마음 깊이 애도하는 마음만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다는 것을 자주 떠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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