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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브 May 12. 2018

나는 미식가가 아니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내가 어릴 적, 강변 테크노마트는 랜드마크였다.

지금도 작은 건물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는 더욱 커보였고

그 안에는 세상의 모든 즐거움이 가득해 보였다.


지금 나는 광장동 부근에 살고 있다.

2호선을 타고 어딘가 다녀올 때는 항상 테크노마트 앞에서 마을버스를 탄다.

며칠 전에도 어김없이 강변역에 내려 버스를 타러 테크노마트 앞을 지나다 멈춰섰다.

저녁 시간이었고 집에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오랜만에 테크노마트 지하 푸드코트에서 저녁을 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크노마트 1층은 엔터식스가 들어서면서 꽤나 깔끔한 쇼핑몰의 느낌이 든다.

하지만 지하는 거의 예전의 모습 그대로.

푸드코트에 들어서니 몇 곳은 비어 있고 저녁 시간인데도 손님이 거의 없었다.

상인 분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었고 인테리어, 메뉴 등 맛있어 보이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치즈 돈가스나 하나 먹어야 겠다' 라는 생각으로 돈가스 가게로 향하고 있는데

적어도 80세는 되어 보이시는 옆옆 가게 주인장 할아버지께서

나를 향해 "어서오세요"라고 말하시며 미소를 보이셨다.

그때 나는 느꼈다.

'아 저기서 뭐라도 먹어야 겠구나'

나는 인사를 건낸 뒤 메뉴판을 쓱 둘러봤다.

다행히 내가 먹지 못하는 매운 메뉴는 없었고 그 중 치즈 그라탕을 주문했다.

괜히 죄송한 마음에 카드도 괜찮냐고 물었는데 할아버지께서는 다시 한 번 환하게 웃으시며

"물론이죠"라는 대답과 함께 카드를 공손히 받아 결제를 해주셨다.

10분 정도 후에 음식이 나왔고 역시 맛은 별로였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식가가 아니라 다행이다'


나는 집에서 어머니가 밥을 해주실 때도 밥이 질건 국이 싱겁건 간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물론 배고프면 예민해 지지만 먹을 것에 크게 집착하는 편은 아니다.

치즈도 덜 녹아 있고 소스는 물이 흥건한 그라탕은 사실 먹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끝까지 다 먹었다.

식기 반납 공간에 빈그릇을 놔드렸더니 할아버지께서는 또 다시 미소와 함께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라고 말하며 뒤돌아 걸어가는 데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가슴이 먹먹했다.


그리고 몇 가지 떠오른 생각들.


'우리가 항상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발적인 비합리적 소비를 즐긴다'

'할아버지는 본인이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영업을 실행하고 계신다'

'테크노마트 지하상가는 충분히 활성화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브랜딩이 필요하다'

'어르신들이 운영하는 각종 가게에 대한 무료 혹은 저렴한 컨설팅, 마케팅 손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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