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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섭 Mar 12. 2022

일개 개인이 거대 조직에 맞서는 법

1인 기업형 인간의 갓생_민원 활용법

진상 민원인 대처법 마련이 한때 숙제였다. 공공기관 민원 담당자였기 때문이다. 회사 출입구에서 고래고래 고함치는 민원인이라도 생기면 하루 종일 비상이다. 온 직원이 안절부절못한다. 콜센터 상담원이나 직원 응대내용이 마음에 안 든다, 불친절하다 등 그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공공 프로그램 참가자가 환불과 정신적 피해보상을 요구한 도 있었다. 다른 참가자와 불화를 겪다 중도 하차했기 때문이다. 상급 기관인 시청에 민원을 넣는 바람에 직원 가족까지 동원되어 서로 민원을 넣으며 물고 뜯는 대참사가 생겼다. 민원 처리 기간도 빠르면 며칠내, 한주, 한달 가까이 걸릴 때도 있다. 민원 처리자 입장에서는 속이 타들어 간다. 처리 기간과 응대의 적정성, 민원결과 만족도까지 챙겨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민원인과 담당 직원의 입장, 문제 상황과 해결방안까지 속속들이 들어다 봐야 한다. 소홀히 일을 처리했다가는 까딱 민원을 더 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개인의 시대다. 미투부터 각종 민원에 이의 제기가 끊이지 않는다. 국가와 공공기관, 대기업 등 힘 있는 조직도 마냥 마음 놓을 수 없다. 부당하거나 무성의하게 일을 처리했다가는 자칫 세간질타를 받을 수 있어서다. 그리고 그 시작은 한 개인이다. 똘똘 뭉친 개인들이 들고일어나면 더 무섭다. 조직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런 개인의 입장을 더 절감하게 된다. 직장을 나와 독립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1인 기업. 해야 할 일은 많은 기업을 표방하지만, 신분은 일개 개인이다. 더 이상 뒤를 봐주는 거대 조직은 없다. 대신 부딪힐 일만 잔뜩 쌓였다. 이제 공수가 바뀌었다고 할까. 민원 처리자에서 민원인이 되었다. 런 공격 기회(?)가 썩 유쾌하지는 않다. 뭔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처리 못하는 한계 상황이 그 전제이기 때문이다. 조직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는 삶을 살다가 야생에 던져진 느낌이랄까. 그런 공격성은 생존을 위한 한 마리 야수의 포효로 들린다. 웃픈 현실이다.


"억울해도 어쩌겠어"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기면 항상 그저 그런 결과를 낳는다. 만회할 수 없는 처참한 손실을 입기도 한다. 민원은 어쩌면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의 문제다. 어떤 역경도 뚫고 나가겠다는 자기 의지의 표현이다. 단, 그 방법 선택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이런 민원인의 '지위'를 악용하는 사례가 늘었다. 단순한 자기 실수나 견해 차이로 기분 나쁜 감정을 마구 쏟아붓는 것이다. 민원의 대상이 되는 담당자도 어쩌면 자신과 같은 일개 개인일 수 있다. 민원인의 무소불위 권한 앞에서 대항할 수 없는 약자가 되기도 한다. 한 개인의 권익을 위해 다른 개인을 희생한다면 결코 오래갈 수 없다. 감정적 표출은 그 자로 목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더 문제를 키우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순간 욱해서 그럴 경우 뒤돌아서면 후회와 꺼림칙한 기분이 남을 뿐이다. 하지만 상한 마음과 분노 에너지를 적절히 활용하면 도움이 된다. 대신 잘못된 구조와 관행, 제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거대 조직이 민원의 최종 타깃이 되는 것이다. 자기 편향성과 효율을 이유로 개인의 입장에 눈 감고 꿈쩍 않은 대가다.


이용자(민원인)의 사정을 봐주고 싶어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담당 직원이 책임을 물거나 징계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적 문제에 민원은 도움이 된다. 민원이 들어오면 전체 부서, 조직 차원에서 문제를 다시 검토하고 답변(해결안)을 마련한다. 잘되면 예외를 인정받거나 정상 참작이 되고, 훗날 그 의견이 정책에 반영되기도 한다. 조직의 관심과 변화를 유도하고, 예방하는 효과도 볼 수 있다. 자신과 같은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조직적 개선방안을 마련하도록 선의의 직원을 위한 판을 깔아주기도 한다. 물론 그 외, 직원의 일탈이나 안일한 업무처리, 고자세 등은 개인이 민원의 대상이 된다. 이미 개인도 조직적 관행이나 문제의 일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아닌가?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어? 관공서, 기업 등 거대 조직이 꿈쩍이나 하겠나." 하지만 민원과 이의 제기로 꽤 많은 변화와 긍정적인 답변을 이끌어 냈다.


코로나로 공실이 되다시피한 운영 숙박업소에 규정이 바뀌었다면서 10년 만에 찾아와 새로 크고 작은 온갖 소방시설을 다 갖추어라고 하던 관할 소방서에 보완 기간을 연장받고, 다음번에는 작은 업소들은 대상에서 빠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정책적 유연성을 끌어냈다.

코로나 피해 지원 담당 부처를 물어보니, 자신은 모르겠다며 콜센터에 전화하라며 퉁명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던 소상공인 지원기관 상담직원의 불친절에 대한 사과와 전화응대 교육, 재발방지를 위한 감사기관과의 협업을 끌어냈다.

소상공인 전기요금 감면 절차를 몰라 두 번이나 잘 못 설명해 업무 착오를 일으킨 한전 직원의 교육과 업무숙지를 위한 담당자들의 주의를 끌어내고, 불성실 답변에 대한 보완설명과 감면절차 개선 제안에 대한 정책 재검토를 받았다.

잠깐 자리를 비운 도서관 자료실 책상 위 책을 수차례 정리하고 자의적인 답변으로 불편을 준 직원 업무 관행에 대한 사과와 개선을 끌어내고, 소음을 야기하는 컴퓨터실 시설(키보드)을 무소음으로 교체했다.

기타 기업 관련해서는 온도 차이로 항상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냉온수기의 구조적 결함을 증명해 기간이 끝나 보상 못해준다는 업체의 무상 환불을 끌어낸 것 등 보상, A/S, 업무개선을 수차례 받았다.


요즘 공공기관은 꽤 민원 응대에 진심인 것을 느낀다. 그만큼 개인의 힘이 커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끔 여전히 '나 몰라라' 식의 업체나 기관, 담당자들이 있다. 이럴 때 기업은 소비자 보호원, 공조직은 상급 기관, 담당자는 부서나 단체 책임자 등을 들먹이는 것도 효과가 있다. 물론 정당한 요구가 묵살되는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써다. 어쩌면 상대 입장에서는 협박처럼 들릴 수도 있다. 자기들끼리 입 맞추고 대충 넘어가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것이다. "민원 해결에 진짜 최선을 다해달라. 그렇지 않으면 더 피곤해질 것이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이런 식으로 점차 '민원 빌런'이 되어가는 듯싶었다. "이제 그만 민원질을 해야겠다" 마음먹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민원을 올렸다. 분통 터지는 일이 또 생긴 것이다.


지난해 한전 계약 전력량을 10kw에서 3kw로 줄였다. 운영 업소 이용객이 코로나로 확 줄었기 때문이다. 한전에서 미사용 전력을 감소해 전기요금을 절약하라는 안내가 왔다. 몰랐는데, 이것 때문에 상업용에서 주택용으로 전력이 변경된 것이다. 그리고 올해 초 잠깐 단체 손님이 다녀간 뒤 전기요금 폭탄이 터졌다. 평소 내던 금액의 3-6배가 더 나온 것. 지난해 총 감면받은 금액보다 오히려 더 기 요금을 낸 결과가 됐다. 계약 변경한다고 건물주 사인받고, 기존 몇 년치 사용전력 비교에 적정 사용량 계산까지 얼마나 수고가 많았나. 결국 이 모든 노력이 말짱 도루묵 된 것이다. 최근 한전 측과 다른 일로 통화하다 알아보니, 3kw부터는 주택용 전력이라 초과 사용량에 대한 요금이 대폭 는 것이라고 했다. 또 계약을 상업용으로 다시 변경해도 차액 환불이 안 된다고 했다. 요금을 이미 냈기 때문이란다. 이 얼마나 행정 편의주의적인 발상인가. 변경 시 일절 그런 고지도, 이후 이상 사용량에 대한 모니터링과 안내도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본 것이다. 먼저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요금이 많이 나왔을 때 한 번만 확인했더라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전 측도 일부 책임이 있지 않을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상 상황에서 최소한의 고지라도 하고, 정책적으로 구제할 방법이 혹시라도 있지 않을까. 그런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민원 글을 적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상하게 마음이 잦아들었다. 다 쓰고 나니 뭔가 후련하기까지 했다. "요금 폭탄이 웬 말입니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실의에 빠진 소상공인을..." 등 다시 읽어보니 실소가 절로 났다. 개선 제안인 동시에 한 편의 드라마를 쓴 것이다. "아, 애쓴다." 자조감이 들었다. 이런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감정의 배설구 같은 역할을 했다. 상황을 객관화하는 데 도움이 됐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대안을 제시하고, 상황이 바뀔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 비록 사후약방문이지만, 그것이 다시 민원을 쓰는 이유다.


(이후 덧붙인 글: 한전 민원 제기 며칠 후 담당 직원의 연락을 연거푸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검침 직원이 이상 사용량을 알려줘야했는데 미처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상업용 기준으로 폭탄 요금 차액을 고스란히 돌려받았다! 뭔가 상식적인 일이 아닌 부분은 분명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모르는 상대방의 실수 때문일 수도 있다. 답답한 상황이 생기면, 민원이든 무엇이든 최대한 방법을 찾고 두드려 보자. 그럼 자신도 모랐던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다. 새로운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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