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Seoul
서울과 모스크바, 6000km 교환일기 첫 번째 키워드는 '행복'입니다.
To. 상호
얼마 전에 책을 한 권 샀는데 이 문장이 눈에 띄더라고. "요즘 행복하세요?" 한참을 들여다봤는데도 '나 요즘 행복한가'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거야. 행복이 뭘까?
행복이란 단어를 떠올린 지 오래되었다. '행복하다'라는 감정을 느껴 본 지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평소 '좋은 건 좋다고 아름다운 건 아름답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나름의 철학을 지닌 나로서는 행복하면 행복하다고 즉각 표현하는 것도 당연한 일상의 일부였는데 '행복하다'라는 언어를 입 밖으로 내뱉은 지가 이미 까마득한 옛날이다.
행복이 어떤 것이었더라.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아마 보통의 행복은 명사 2번의 뜻처럼 쓰이는 것이겠다.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 그렇다면 '행복하다'라는 감각을 느낀 지 오래된 것 같다는 지금의 나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일까.
곧바로 나열했다.
1.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장소에서 맛있는 음식이나 커피를 마시며 서슴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2. 좋아하는 사람이 내 앞에서 바보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일 때
3.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의 패를 깠을 때
4.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떤 모습의 나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때
5. 걱정이나 근심이 그냥 한 순간에 심플해질 때
6. 근면 성실한 하루를 보내고 작은 성취를 이루었을 때
7. 누군가에게 나의 진심이 닿았다고 느낄 때
(좋아하는 사람은 가족, 친구 모두!)
1번부터 7번까지를 쭉 나열한 뒤 두 가지 작업을 했다. 비슷한 것끼리 분류하는 일과 현재 시점으로 Yes와 No를 구분하는 일. 첫 번째 작업에서 나눈 키워드는 1~4번까지가 사랑, 5~6번이 성취, 마지막 7번은 영향력. 두 번째 작업에서는 5,6번을 제외한 대부분의 항목이 Yes 였다.
Yes라고 대답한 항목들은 주로 나와 타인과의 관계가 핵심이다. 나는 주로 힘을 빼고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의 만남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분위기가 고조될 때 상대가 나에게 자신의 패를 까보이며 바보 같은 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있으면 '그가 나에게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게 되었구나' 하며 비로소 나도 그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안심의 관계에 들어선다. 이 사람에겐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다는 안심. 최근엔 또 한 명을 내 안심 리스트에 추가했다. 나에겐 이런 친구가 여섯이나 있다.
나는 내 삶에 자신이 있다고는 자랑스럽게 말하지는 못할지언정 스스로에 대한 자기 확신은 있다. 꾸준함과 성실함이 강력한 무기라는 점, 한계를 인정할 줄 알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내려는 점 등이 그 근거. 그리고 무엇보다 오랜 시간 자신에 대한 탐구를 해온 덕에 자기 객관화가 빠른 편이다. 그래서 어딜 가도 중박 이상은 할 자신이 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멋지고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소신껏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내 삶의 방식이 옳으니 나처럼 사세요'라는 말이 아닌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어요. 대신 이렇게 살면 느리긴 해도 이런이런 장점이 있어요'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것이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내 삶은 그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가끔 아주 가끔 나의 이런 마음이 글이나 말로 전해졌을 때 도움이 되었다는 메시지를 받는다.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5,6번은 완전한 No는 아니다. Yes와 그 중간 어디쯤. 이 둘은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나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기지 않을 때 주로 생각이 많아지고 걱정과 근심에 잠식당한다. 그리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을 타인의 사랑으로 채우려는 마음이 생긴다.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은 잘못이 아니지만 (누구나 그런 마음을 품고 있지만) 나 스스로를 책임지지 못할 때는 그 어떤 것보다 치명적이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나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할 줄 알며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자유롭다. 약간의 걱정과 근심은 여전하지만.
일곱 가지 리스트 중에 다섯 개가 Yes이고 두 개가 세모라는 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난 이미 행복하다. 존재가 받아들여지는 관계 안에서 충만한 사랑을 주고받는 친구들이 있고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분명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고 그에게 진심이 닿고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도 있다.
실은 "요즘 행복하세요?"라는 질문 첫 줄엔 '전혀 행복하지 않다. 생활과 일상이 멈추어있는 기분'이라고 적었었다. 하지만 이 글을 써 내려가면서 '난 이미 행복하다'라는 문장으로 고쳐 썼다. 돌이켜보면 늘 행복이란 별 게 아니었다. 명사 1번의 뜻처럼 거창하게 운수가 좋은 행복도 행복이지만 우리에겐 다행히 2번의 뜻대로 소박한 것으로 채울 수 있는 행복의 기회들이 아주 잦게 찾아온다.
그러니 가끔 행복하냐고 물어보는 거, 나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물어보자. 들여다보자. 점검해보자. 이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행복은 배가 될 테니까.
난 오늘 아빠가 보내준 고구마를 사람들과 함께 나눠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는 말을 전하면서 수화기 너머로 아빠의 목소리에서 행복을 알아차렸어. 고맙다는 내 전화 한 통이 아빠의 행복이었던 거야. 알면 알수록 행복이 별 게 아니네. 너 요즘 행복하니?
From. 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