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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가 사랑한 카메라

Minox 35GT - 003

by hongrang

미녹스를 처음 만난 건 동묘시장의 한 좌판 앞에서였다.

나는 동묘를 좋아한다.

아무렇게나 쌓인 물건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시간과 취향이 묻어나는 낡은 것들을 만나는 일.

그날도 바구니 가득 쌓인 정크 카메라들 사이로 눈길을 주던 중, 유리 진열장 한 구석에서 그 작은 카메라와 마주쳤다.

Minox 35와 Rollei 35. 두 대만이 유난히 대접받듯 유리 안에 놓여 있었다.


판매하던 사장님은 자신 있게 말했다.

“이건 독일에서 스파이 카메라로 쓰이던 거야.”


살짝 웃음이 났다.

정확히 말하면, 진짜 스파이 카메라는 더 작은 110mm 포맷의 Rollei 110 같은 모델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정확한 정보는 별 의미가 없었다.

이야기가 있는 물건에는 늘 마음이 간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스파이 카메라’였던 이 작은 기계는, 그렇게 나의 첫 미녹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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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내


Minox 35 GT.

1981년 독일에서 만들어진 이 카메라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35mm 필름 카메라 중 하나다.

폴딩 방식의 앞 커버를 열면 렌즈가 튀어나오고, 조리개 우선 모드로 조용하게 셔터가 눌린다.

겉모습은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가볍지만, 실제로는 *마크롤론(Makrolon)*이라는 강화유리섬유 소재로 만들어져 견고하다.

무게는 고작 190g 남짓.

셔츠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전혀 부담이 없을 만큼 가볍고 작다.


090300030015240903.jpg 안동 계곡




오랫동안 책장에 고이 올려두기만 하던 이 카메라는

지난겨울, 삿포로 여행을 떠나기 전 문득 손에 쥐어졌다.

두툼한 패딩과 목도리, 부피 큰 짐들 사이에서 짐을 줄여야 했고,

어떤 카메라를 가져갈까 고민하던 끝에 고른 것이 바로 미녹스였다.


짐을 다 챙기고 나서 마지막으로 코트 주머니에 쏙—

그렇게 자연스럽게 따라온 여행이었다.


틱~~~~~~~

미녹스의 셔터음은 ‘찰칵’이라기보다 그냥 ‘틱’ 하는 느낌에 가깝다.

너무 조용해서, 사진이 찍힌 줄도 모를 정도다.

게다가 렌즈가 접히는 구조에 작디작은 외형까지 더해지니

사람들은 이게 진짜 카메라인지도 잘 모른다.

스크린샷 2025-02-13 오후 11.43.52.png 골목에 작은 신사 - 오타루
스크린샷 2025-02-13 오후 11.44.43.png 택시
스크린샷 2025-02-13 오후 11.44.59.png 삿포로지상철


어느 밤, 작은 외장 플래시를 달고 친구를 찍었는데

그 친구는 카메라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야, 이거 장난감이야?”

나는 웃으며 셔터를 눌렀다.

그 순간이 좋아서.

진짜 카메라라는 걸 모르는 채, 마음 놓고 장난치는 사람의 얼굴.

그건 아무리 좋은 장비로도 얻기 힘든 장면이다.

스크린샷 2025-02-13 오후 11.45.14.png 눈오고 다음날 횡단보도


미녹스는 목측식 카메라다.

이중합치도 없고, 초점 스크린도 없다.

내가 손으로 돌려 맞춘 초점은, 거의 늘 ‘감’에 의존했다.

그래서 대부분 F8이나 F11로 조리개를 고정하고 무한대에 맞춘 채 셔터를 눌렀다.

써니 16 법칙을 떠올리며, 눈으로 빛을 읽고 마음으로 장면을 찍는 일.

정확한 구도나 날카로운 초점보다 중요한 건, 그때의 공기였다.


최소 초점 거리는 90cm.

35mm 화각 덕분에 가까이 다가가도 부담이 없었고,

사진은 늘 적당히 자연스럽게 찍혔다.

작은 파인더로는 정확한 구도를 잡기 어려웠지만,

어쩌면 그 애매한 시야 덕분에 오히려 마음이 더 자유로웠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필름을 현상하고 나서야 나는 확신했다.

이 카메라는, 단순히 작고 귀여운 게 전부가 아니었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놀랍도록 단단하고 선명했다.

어느새 책상 위에 무심히 놓인 이 작은 독일산 카메라는

나에게 ‘가벼움’과 ‘충분함’을 동시에 알려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스크린샷 2025-02-13 오후 11.45.09.png 삿포로 골목길에 절

다음에도 가벼운 여행이 있다면,

나는 아마 또 미녹스를 꺼내들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함께 갈 또 다른 친구는 롤라이 35가 되겠지.

둘 다 손바닥만 하지만, 그 작음 속에 묘한 자신감이 있다.

무겁지 않은, 정확하지 않아도 좋은 그런 사진들이

오히려 가장 오래 남는다는 걸, 나는 이 작은 카메라에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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