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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박스를 본 순간,
마음이 먼저 셔터를 눌렀다.

pentax ESPIO 115S - 004

by hongrang
051405520010240517.jpg 찍힌 필름인지 모르고 다중노출

지역 일로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어김없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 있다. 바로 오래된 장터들이다. 딱히 필요한 것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저 심심함을 달래려 발길을 옮기다 보면, 뜻밖의 발견이 손에 쥐어지곤 한다.

영주시장도 그런 곳이었다.

부석사와 소백산 국립공원을 품고 있는 고장, 유네스코 유산과 관련된 일로 1년에 몇 차례나 오게 되면서 자연스레 정이 들어버린 시장이다.


그날도 무심코 걷던 골목 어귀, 문구사로 보이는 가게 앞에 낡은 카메라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한두 개도 아니고, 박스째 새것 그대로. 먼지가 쌓인 박스 위로 시간의 결이 보였다.

그중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은 카메라가 있었다.

펜탁스 Espio 115.


나는 펜탁스를 처음 DSLR로 입문했을 때 사용했었다. 그 이름만으로도 감정이 끓었다.

그때의 카메라는 istDS, 남들이 모두 캐논과 니콘으로 몰릴 때, 나는 펜탁스를 들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필름 시대의 렌즈들이 호환되었고, 그 렌즈들의 코팅은 아름답기까지 했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펜탁스는 기능보다는 ‘감성’의 이름이었다.

051405520017240517.jpg 기능은 없지만 다중노출

조심스레 감정을 숨기고 할머니 사장님께 물었다. “이거 얼마예요?”

마음은 이미 반쯤 샀지만, 표정은 퉁명스럽게 굳혔다.

“3만 원.”

더 깎아볼까 고민하다가 가게를 곧 정리하신다는 말에 단박에 샀다.

몇 개의 오래된 물건들을 더 얹어, 5만 원. 그렇게 나는 그날 시간을 사고 돌아왔다.


가져온 카메라를 꺼내 보았다.

38–115mm 파워줌 렌즈, 자동 초점, 1/400초 셔터속도.

수치나 기능들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필름을 넣고 전원을 켜자 들려오는 소리—


“위이이잉~ 찡.”


기계가 살아 움직이는 그 소리 하나에 심장이 반응했다.

기억 속 자동카메라들은 하나같이 이런 소리를 냈다.

파인더 옆 인디케이터에 붉은 불이 아닌 초록 불이 들어오면, 초점과 노출이 모두 맞았다는 신호.

약간의 딜레이는 있지만, 맑은 날이라면 가뿐하게 한 장을 남겨준다.

흐린 날 흑백 필름으로 찍은 사진은 차분하고도 촉촉한 감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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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이와 송강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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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모델은 접사 기능과 백라이트 버튼이 빠진 115S 버전이었다.

그게 어땠나.

백라이트가 없다고 야경을 찍을 것도 아니고, 접사는 안 되는 게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카메라는 그냥, 맑은 날 평범한 풍경과 일상 속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눈에 띄진 않지만, 분명한 색감.

조용하지만, 분명한 존재감.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카메라를 산 게 아니라,

그 시절의 나를 하나 구해 온 건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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