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본색》은 오우삼 감독의 대표작이자, 홍콩 누아르의 전성기를 연 영화다.
의리와 배신, 복수라는 고전적 주제를 세 남자의 드라마로 그려냈고, 주윤발이 성냥개비를 물고 등장하는 순간은 한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70년대생이라면 누구나 이 영화를 기억한다. 가을 거리를 나서다 트렌치코트를 보는 순간,
입가에 어느새 성냥개비를 문 듯한 기분이 들고, 흥얼거림 속에서 영화의 주제가가 되살아난다.
“웨매이 음흐흐흐…” 흥얼거리기만해도 떠올랐던 콧노래.
의미를 묻지 말라, 오늘을 묻지 말라. 한때 청춘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던 가사였다.
누구나 긴 바바리코트를 입고 나타나면 함께 흥얼거렸고,
“네가 주윤발이냐”라는 핀잔이 자연스레 따라붙곤 했다.
가을과 바바리코트의 조합은 언제나 남자의 허상을 자극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주윤발처럼 카리스마 넘치게 걸쳐보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늘 낭패다.
코트는 흐트러지고, 발걸음은 영화처럼 누아르 하지 않다.
하지만 그 실패마저도 어쩌면 세대의 의식 속에 새겨진 ‘영웅본색’의 그림자일지 모른다.
얼마 전, 홍콩을 배경으로 한 여행 프로그램을 보았다.
영화의 첫 장면, 카키색 바바리를 입은 주윤발이 담배에 불을 붙이던 장소가 황후상 광장이라고 소개되자, 순간 나도 모르게 비행기표를 결제할 뻔했다.
화면 속 한 장면이 아직도 현실의 마음을 흔든다.
선글라스를 멋지게 쓰고, 창펀을 먹다 말고, 특유의 동작으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는 모습.
그 환영 같은 장면은 남자의 마초적 감성에 기름을 붓는 순간이었다.
나는 세 편 중에서도 《영웅본색 2》를 가장 좋아한다.
형의 총알 자국이 남은 바바리를 주윤발이 다시 걸치는 장면.
그것은 단순한 의상 교체가 아니라, 의리와 유산을 짊어지는 남자의 선언이었다.
스크린 속 허무와 비극은 오히려 청춘에게 뜨거운 정의를 대변하는 메타포였다.
남자들의 이야기, 폭력, 의리. 그것은 70년대생이 공유한 하나의 암호 같은 언어였다.
현실에서 우리는 총을 들지도 않았고, 복수의 무대에 서지도 않았다.
그러나 가을바람 속에서 바바리를 여미면, 잠시나마 스스로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이 찾아왔다.
성인이 되어 대학에 들어갔을 때,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처음 옷을 고를 기회가 생겼다.
그때 나도 모르게 바바리코트에 손이 갔다.
또래들 중에서도 키가 작은 내가 바바리를 잘 소화할 리는 없었지만, 한 번쯤 입어보고 싶었다.
고등학생 시절엔 교복 위에 학생코트를 걸치던 것이 전부였기에, 진짜 바바리를 입는다는 것은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 같았다.
거울 앞에 서서 코트를 여몄을 때, 그 순간만큼은 스크린 속 주윤발의 그림자와 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그 순간 품었던 설레는 감정이 오래 남았다.
영화는 끝났고, 홍콩 누아르의 시대도 저물었지만,
가을 거리에 바람이 불어오고, 바바리코트를 만날 때마다 다시금 주제가가 귀에 맴돈다.
영화는 끝났고, 홍콩 누아르의 시대도 저물었다. 1997년 홍콩의 반환은 영화 속 뜨거운 의리와 배신의 서사를 현실 속 불안으로 바꿔놓았다. 관객은 더 이상 총성과 피로 얼룩진 우정을 원하지 않았다. 극장은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로 가득 찼고, 본토의 검열은 누아르의 불꽃을 꺼뜨렸다. 무엇보다 스크린을 채웠던 얼굴들—주윤발, 장국영, 적룡—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면서, 장르 자체가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일부 이미지는 AI를 통해 제작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