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처음 느껴본 감정이 있었다.
그건 시기, 질투, 열등감, 그리고 좌절감이었다.
나는 늘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비교나 경쟁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예전엔 친구가 나보다 좋은 성적을 받으면
“오, 열심히 했네! 축하해!” 하고 진심으로 박수를 쳐줄 수 있었다.
남과 비교하지 않아도 내가 세운 기준만 충족하면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까.
그래서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 친구들이 다 나보다 먼저 잘 됐으면 좋겠어.
나는 기쁜 마음으로 박수쳐 줄 수 있을 거 같거든.”
그런 나에게 시기와 질투는 아주 먼 세상의 감정이었다.
그런데 30대에 들어서 처음으로 그 감정들이 찾아왔다.
내 인생은 생각만큼 풀리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잡아갔다.
그래도 진정으로 아꼈던 사람들이 찬란히 빛날 땐
거리낌 없이 박수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 행복한 웃음을 지을 때,
마음속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한때 그를 용서했다고 믿었다.
나는 넓은 그릇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렇게 나를 설득하며 체면을 세웠다.
하지만 그 사람이 행복해질수록 내 마음의 그릇엔 금이 갔다. 그 금이 번질 때마다 스스로가 초라해졌다.
‘내가 이렇게 후질 수 있구나.’
그걸 인정하는 게 너무 불쾌했다.
내 안의 그늘진 감정을 들여다볼수록 ‘이게 나였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용서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걸까.
앙금은 예상보다 길게 남았고, 결국 나는 축하 대신 거리두기를 택했다.
그와 멀어지며“그래,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인데…”라고 되뇌며 내 도망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전혀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해소되지 않는 찌꺼기가 점차 쌓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 부유물을 오래 들여다봤다.
가까이, 더 가까이.
그 속엔 ‘존중받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나를 특별하게 여겨주길 바랐고, 그렇지 못했을 때 상처받았다. 나를 몰아세우고 부담스러운 부탁을 해와도 참아주고 받아줬다. 나의 노력과 배려가 고마움으로 남을거라 생각했다. 그 고마움이 나의 존재를 값지게 만들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생각과 달랐다.
‘함부로 해도 괜찮은 만만한 사람.’
내가 받은 가격표는 하찮았다. 그렇게 취급받을 때마다 자존심이 무너지고, 그 잔해들이 내 안을 끝없이 떠다녔다.
나는 어째서 경계를 세우지 못하고,
스스로 '이용당했다'고 느낄 때 까지 나를 내몰았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어릴 때 충분히 수용받은 경험이 없었다. 소외되는 게 익숙했고, 밀려나는 아픔을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누군가 내 슬픔을 알아주길, 말하지 않아도 안아주길 바랐다. 그 따뜻함이 늘 간절했다.
그래서일까. 누군가 상처받은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다.
“내가 저 사람의 마음을 들여봐 주고 도와주면 저 사람은 행복하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마음엔 또 다른 기대가 숨어 있었다.
“내가 원했지만 받지 못했던 따뜻함을 그 사람에게 주면, 그도 나를 소중히 여겨주지 않을까?”
그래서 마음을 다해 보듬었지만 돌아오는 건 고마움이 아니라 더 큰 목마름이었다. 내가 준 만큼, 아니 그 이상을 계속 요구받을 때 나는 서운함과 분노로 무너졌다.
“이용당했다.”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보답받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걸. 그 두 마음을 분리하지 못한 채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알아주길” 바라고 있었다. 결국 그 사고방식이 나 자신을 가장 힘들게 만들었다.
반쪽짜리 자애는 자해였다.
주고 나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경계 없는 친절은 베풀지 않고,
내가 나를 존중하는 것,
이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건강한 방식이었는데
이걸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