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알아둬야 할 개념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존재하는 독특한 숙박 시설을 '알베르게'이다. 알베르게 (Albergue) 한국어로 여관이라는 뜻이다.
유럽에서 다인실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러 보셨다면 알베르게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해가 빠를 것이다. 2층 침대가 빼곡한 다인실이고 부엌과 화장실을 공유한다.
유럽인들은 다른 사람과 함께 방을 쓰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고 하나 수줍은 유교걸인 나는 화장실을 공유하는 것도 불편했다. 그러나 첫날 알베르게에서의 경험은 놀라웠다. 마치 고교시절 수련회에 온 듯 설렜다.
모두 지쳐 잠든 밤, 다른 여행자의 대차게 코 고는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리는 기적을 경험했다. 죽도록 몸이 고됐기 대문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알베르게를 소개하는 이유는 코를 심하게 골았던 유럽 아재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산티아고 순례길의 알베르게만이 가진 독특한 문화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1. 한 곳에서 2박 불가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지? 돈을 내겠다고 해도 안된다는 것인지? 그렇다. 원칙적으로는 불가하다. 잠에서 깼으면 후딱 씻고 짐 챙겨서 오전 일찍 다음 마을로 떠나야 한다.
나 같은 엄청난 잠탱이 빼놓고는 모두 아침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고 새벽 일찍 떠나기 때문에 오전 7시만 돼도 침대는 텅텅 빈다.
그 후 알베르게 청소가 착착 시작된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순서로 이루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여행자들에겐 정해진 일정이 있기 때문이다. 800km 35일.
이 길 위에 있는 모든 침대들은 이전 마을에서 출발한 새로운 여행자들을 맞이해야 하는 숙명을 지녔다. 갈 사람은 얼른 가고 올 사람은 와야 한다.
2. 침대에 가방 올려놓기 금지
매일 새로운 사람이 같은 침대에 눕는다. 어젯밤 내 침대에서 대체 어디에서 온 작자가 잠을 잤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저 깨끗이 청소되었기를 믿고(?) 고단한 몸을 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알베르게 침대 위에 가방을 올려놓을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 이전 숙소에서 은근히 딸려온 벌레 (특히 빈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철저히 금지한다.
나도 처음에 이 규칙을 몰라서 침대 위에 가방을 척하니 올려두고 물건을 꺼내다가 한소리 들었다. "노놉 가방 내려놔!" 좋은 규칙이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에서 유난히 깔끔을 떠는 한국인들은 침대 커버도 챙겨 다니며 착착 씌우고 자야 한결 마음이 편하다. 부디 침대 커버까지 잘 챙겨가시길!
3. 원하는 침대에서 잘 수 없음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여행자들이 온다. 노약자는 기본이고 몸이 불편하신 분들도 많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때로는 먼저 도착했음에도 불편한 자리에 배정될 수 있다. 만일 핸디캡을 가지신 분이 아무도 없다면?
선착순으로 침대를 차지(?)할 수 있다.
좋은 침대를 차지하고자 하는 나의 집착 속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행운을 얻었다. 어째서 내게 그런 욕구가 있었을까? 그로 인해 그동안 어떤 일들이 발생했을까?
객관적으로 나를 본다는 것이 무엇일까?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객관적이라는 것은 내가 바라는 내가 아니라 3자의 관점을 가지는 태도를 말한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까? 쉽지 않다.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이미 오랜 시간 축적된 내 경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MBTI와 같은 성격진단도구는 상당히 주관적인 자기 평가이다. '나는 이러하다.' 하는 문항에 스스로 체크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 확인할 수 있으나 객관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나를 잘 아는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작성한다면 좀 더 명료하게 자신을 탐구할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좋은 침대를 선점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환기가 잘 되는 위치에 놓인 햇빛이 잘 드는 침대가 좋다. 가급적 나무 침대보다는 철제 침대가 좋다. 나무 침대에는 벌레가 살고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머릿속에는 자연히 공식이 생겨났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
=
좋은 침대를 차지하는 것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
1. 빨리 걸어야 하고
2. 자주 쉬면 안 된다.
그러나 나는 목적달성에 자주 실패했다. 걸음의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원인은 나에게도 있지만 괜히 조상 탓도 해본다. 팔자걸음을 걷는 걸 어떻게 해? 어쨌든 나는 뒤지게 느렸다.
그동안 적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걸음이 느리기 때문에 손해 볼 일은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무지하게 손해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옆으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보다 좋은 침대를 차지할 나쁜(?) 놈들...
그들은 참 친절하게도 꼭 티를 내면서 지나갔다. 왜냐하면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하는 것이 순례자들끼리의 인사 예의이기 때문이었다. 느려터진 나는 어쩔 도리없이, 묵묵히, 수도 없이 그놈의 '부엔까미노'를 들어야만 했다.
다리를 절뚝이는 사람이 내 옆을 스쳐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갈 때 그 열받음이란... 내 다리는 대체 뭐 어떻게 된 걸까? 왜 이렇게 굼뜬 것이지? 척척 척척척 걷는 게 안되니?
날 미워했다.
뒤쳐진다고 느껴질 때.
날 채근했다.
좀 더 하라고, 왜 넌 못하냐고.
미워하고 채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좋은 침대를 차지할 테니까.
그래야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니까.
그렇게 때로는 좋은 침대를 차지했다.
그래서 결국 난 어떻게 된 걸까?
행복했을까?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생각했다.
하루가 또 시작되었구나.
매일 밤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내일은 눈을 뜨지 않기를.
생각해 보면 불안감이 현실이 된 날은 별로 없었다. 막상 도착해 보면 어느 침대든 그 나름의 편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햇빛이 드는 침대를 차지하지 못할 거라는 막연한 나의 불안은 오래된 습관이었고 허상이었다. 느려 터진 걸음을 자책하며 걸었던 날은 하루 종일 즐겁지 않았다. 왜 사는 거지? 행복하려고 사는 거 아닌가?
실은 30년 넘게 그렇게 살았다.
이미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을 다 놓치고 가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못난 자신을 채근하며 그렇게.
인적이 없는 좁은 시골길을 걷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하루 종일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들처럼 단 한 번도 부딪힐 일이 없다면? 난 괜찮을까?
아니, 몹시 두려웠을 테다. 시간이 너무 천천히 흐른다고 느끼고선 죄다 그만두고 싶어 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 날 누군가가 밝은 미소로 '부엔까미노'하고 인사하며 내 옆을 스쳤다면 나는 그를 불러 세웠을지도 모르겠다. 부디 나의 동료가 되어주겠냐고.
나를 객관적으로 돌이켜본다. 난 주변인들을 동료로 바라보지 못했다. 오히려 경쟁자로 여겨왔다. 나보다 잘난 사람들을 미워하고 열등감을 느꼈다. 나를 채근했다. 저 인간보다 빨리 하란 말이야. 좋은 기회 다 놓치고 싶어?
인적 드문 시골길,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실은 내 보호자이고 친구이고 동료인 것을.
나의 고독한 인생을 풍부하게 채워주는 고마운 사람들인 것을.
그걸 몰랐다.
두려웠기 때문에.
그다음 날부터 놀라운 일이 발생되었다. 느려터진 내 걸음을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를 봐! 팔자로 떠억 걷는 멋진 나. 이 걸음걸이만 보면 귀족의 후예나 다름없다. 조상님 감사합니다. 한걸음 한 걸음씩 우아하게 내딛는다.
천천히 걸으니까 자세히 보인다. 시원한 계곡이 보이면 양말을 벗었고 카페가 나오면 카페 라테를 마셨다. 아니, 스페인에서는 카페 콘레체라고 불러야지!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주변인들이 동료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니 대하는 것이 편해졌다. 그저 좋았다. 나보다 잘나서 미웠던 사람들도 그저 순수하고 맑은 개나리 꽃처럼 보였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전보다 열 배는 늘어난 듯 인간관계가 풍성해졌다.
나를 찾는 여행이 나에게 준 소중한 선물.
풍성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방법.
<왜 하필 산티아고>는 '불안한 미래, 미리 보기'를 목적으로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 약 40일간 걸었던 평범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800Km를 걸으며 대체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어떻게 변화했는지 변화와 성장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매주 월요일에 발행됩니다.
12월 4일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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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송수연 코치는 '어떻게 잘 살아야 할까?'라는 주제로 강연과 코칭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생각과 감정을 조절하여 원하는 삶을 끌어당기는 방법을 안내합니다. 당신의 '잘 삶'을 응원합니다.
송수연 코치의 <가벼워져서 돌아올게요>, <펀어게인> 읽고 오시면 좋아요!
자아 코칭, 나를 찾는 여행 질문, 각종 문의는 메일로 주세요! juneerr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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