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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수연 Aug 01. 2023

절박유산

41세 딩크족에게 아기가 굴러 떨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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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하는데 갑자기 생리하듯 피가 울컥 났다. 집에 와서 보니 팬티가 한 움큼 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곧 샤워를 하고 3층 서재에 올라와 일을 했다. (응?)


아무도 몰랐겠지만 사실 나의 큰 장점은 위기에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시나 그날도 강점이 십분 발휘되었다. 괜찮겠지 뭐! 하며 사건의 해결을 다음날로 미루었다.


다음날, 피는 여전히 흐르고 멈추었다. 멈췄으면 된 거 아닌가 싶어서 스스로 판결을 내렸다.


하혈 기소!
하루 더 지켜보겠다.
내일도 이러하면 병원으로 출두하라!




이럴 수가. 다음날도 어김없이 피가 났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다. 병원에 가서 이 출혈 사태의 진상을 면밀히 조사하는 수밖에.


출혈이 있어 왔다고 하니 간호사들이 갑자기 분주하다. 그때부터 나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뭔가 잘못된 건가? 애꿎은 핸드폰을 꼼지락 거리면서 대기실에 앉아있다가 드디어 진료실에 입장!


의사는 내 말을 죽 듣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12주 이후의 출혈은 비정상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에요.



어머나. 세상에.

그런 거였어?





진단명은 절박유산.

그날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플러스 적인 것이 아니라 무지하게 마이너스 적인 것으로, 놀라지 마시라.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일상생활 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밥도 누워서 먹고, 글도 누워서 쓰고, 일도 누워서 하고, 잠도 누워서... 아! 다행히 원래 잠은 누워서 잔다. 


하혈 유죄
징역 1주일
땅땅



일주일간 꼼짝 말고 누워만 있으라는 (정말 내 성격엔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는) 의사의 판결문을 받아 들고 기신기신 진료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남편에게 이를 알렸더니 남편은 "이따 집에 일찍 갈게."라고 한다.

나는 쿨하고 멋진 아내니까 "괜찮아. 할 거 다 하고 와."라고 했다.

그날 그는 밤 11시가 다 되어 집에 왔다.






그날 밤, 남편이 집에 와서 내게 해주었던 말을 지금도 종종 떠올린다.


밤늦게 회의가 끝나고 서둘러 집에 오는데 대치동 학원가를 지나가게 되었다고 했다. 도로는 아이를 픽업온 차량으로 꽉 막혀 있었고 신호는 바뀌지만 차가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평소 같으면 짜증이 났을 텐데 아이를 갖고 보니 학원을 마친 아이를 기다릴 아빠의 마음이 공감이 되어 마음이 차분해졌다고 했다.


"이번 일로 여보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느꼈어. 여보와 아직 태아인 아이가 소중하게 느껴져서 눈물이 날 것 같았어."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루종일 혼란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나는 지금도 격하게 사랑받는 중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남편의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피는 멈췄으나 의사의 지시를 충실히 따라 침대에서 조신히 4    징역살이를 한 후 병원에 갔다.


그리고 일상생활 복귀해도 된다며 석방 판결을 받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녀의 볼에 뽀뽀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거절할 것 같아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홀가분하게 병원문을 나섰다.


고령 출산 이거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인생이 무지갯빛처럼 알록달록 해졌다.
흑백에서 컬러가 된 기분!

 나이 많은 임신부들이여!
격하게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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