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세 딩크족에게 아기가 굴러 떨어지다.
몇 달 전 일이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던 중 문득 누군가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샤워를 하다 보면 물줄기와 함께 무의식에 숨겨져 있던 자질구레한 일들이 떠오른다. 예전에는 그게 좋아서 아무 생각이나 끄집어내려고 했었다. 그러다 결국 번아웃이 와서 적어도 샤워할 때는 뇌를 쉬게 해 주자 결심하고 씻는 그 자체에만 집중한 지 몇 년이 흘렀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대화가 떠오른 것이다. 잠시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대화의 상대는 연장자로 당시의 나처럼 아이가 없었다. 그에게 물었다.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는 거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낳고야 싶지. 그런데 난 아이를 낳기에 이미 늦어버렸잖아."
늦었다는 것이 무얼까? 신체적인 이유이지 않을까 하고 가늠해 보았지만 왜인지 따져 묻지 않았다. 나이와 무자녀라는 주제에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 이렇게 물었다.
"죽는 그 순간, 엄마가 되어보지 못한 삶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돼요. 분명 후회하겠지만 감당할 수 있는 후회라고 확신해요. 만일 폐경이 와서 아무리 원해도 절대로 낳을 수 없게 되면 홀가분할까요?"
그는 참 현명한 이로 내게 자주 조언을 해준다. 그날도 어김없었다. 잔잔한 말투로 전해주었던 그 이야기가 샤워를 하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다.
중요한 결정을 시간에 맡기지 말고
스스로 선택해도 좋을 거야.
시간에 맡기지 않는다는 표현이 멋있어서 기억해 둬야지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꽤 이것저것을 시간에 맡겨왔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든 되겠지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그 정도 결심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날 샤워를 마치며 '선택'했다.
그래. 결심했어
시간에 맡기지 말고 운명에 맡기자.
(?)
이렇게 중대한 결정을 모지리 같은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결정들처럼 시간에 맡겨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리스인처럼 나와 아기의 운명을 신에게 맡겼다. 오~ 임신 출산의 신이여~ 당신에게 맡깁니다.
나이가 들면 겁이 많아진다더니 조심성만 늘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 결혼하고 아기를 낳지 않으면 도무지 무서워서 시도할 수 없는 것이다. 결혼을 안 했다면 어차피 아이도 단념했을까?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남들 다 하는 결혼을 안 할 수 있었을까?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결심했다.
그래. 운명에 맡기고
운명이 임신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50살에 낳으면 돼!
그랬더랬지. ^.^
40대에 임신을 하고 보니 마흔 넘어 임신할 확률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낮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연 50살에 임신할 수 있었을까?
만일 여차저차해서 임신했다 치자, 나이와 기형아의 상관관계가 적힌 표를 받아 들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런 꿈같은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네, 제가 잠시 무식해서 용감했습니다.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