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남씨의 부엌에서 내가 컸다
누구는 좋아하는 음식으로 삼시세끼를 먹을 수 있다는데 나는 그렇게 애정하는 음식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먹는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먹지도 않는다. 음식에 대한 ‘까탈스러움’과 ‘낯가림’은 모두 할머니 탓이다. 아니 할머니 덕분이다. 할머니는 잠투정이 심한 나를 데리고 아침밥을 지으셨다는 말씀을 자주하셨다. 아기인 나를 포대(강보)에 돌돌 말아 부뚜막에 앉혀 놓고 이런저런 것을 입에 넣어 주셨으리라. 기억의 왜곡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할머니는 음식을 잘 하셨고 맛있는 것은 당연히 내 차지였다.
피키 이터 picky eater 인 내가 유독 공을 들여 먹는 것, 아니 마시는 것이 커피다. 생산량이 극히 제한적이라며 높은 가격을 매겨 놓는 커피를 찾는 것은 아니다. 라떼, 마키아또, 아포가토도 안 마신다. 그냥 물과 커피로 승부하는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 어느 사이의 커피를 마신다. 하루에 한잔 또는 두잔. 커피빈은 블랜딩보다는 싱글오리진을 주문한다. 밖에서 커피를 마셔야 할 때는 에스프레소 머신보다는 핸드드립으로 내려주는 커피를 먹고 싶어한다. 여행을 가면 커피 맛집을 찾아가 마셔본다. 커피 조달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길에는 드립백 커피라도 챙겨간다. 커피를 좋아하는 입맛을 갖게 된 것도 할머니 할아버지 때문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알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타서 드셨다. 요즘의 커피믹스를 수제로 만들어 드신 셈이다. 할머니는 인스턴트 커피를 ‘알커피’라고 부르셨다. 우리 집에는 ‘맥심’ 커피와 ‘프리마’가 있었다. ‘프리마’는 그냥 프림이었지 단 한번도 프리마라고 불린 적이 없다. ‘테이스터스 초이스’ 빨간 병 커피가 가끔 집에 있었다. 쵸이스 커피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주영하 선생님의 책에서 아궁이를 곤로(풍로)가 대신하고 가마솥을 전기밥솥이 대치하면서 누룽지가 사라지자 숭늉을 대신한 것이 커피였다는 대목을 읽었을 때 논리적으로는 설득되었으나 마음으로는 와 닿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저녁에 텔레비전을 시청하시다가 입이 궁금해지실 때 쯤에 커피를 드셨기 때문이다. 우리 집의 커피는 야참 같은 음료였다.
커피, 설탕, 프림의 비율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는 것은 할머니의 지시대로 커피를 제조한 것은 나였지만 정작 나는 마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 머리가 나빠진다고 하셨다. 커피를 마시면 머리가 나빠질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굳이 먹으려 애쓴 것 같지는 않다. 살짝 한스푼 기미상궁처럼 간을 보긴 했었다.
그.런.데. 우리 집이 진짜 다방을 운영하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할머니가 주방장으로 하여 카페를 창업한 셈이다. 나는 다방 뒤에 붙은 살림집에서 교복에 탈부착이 가능한 하얀 ‘에리’(칼라 collar)를 빨아 널고 다림질도 했었다. 내가 유치원 다닐 때 할아버지는 철공소를 하신 적이 있었는데 몇 년 뒤 그 철공소 옆의 다방이 우리 집 다방이 되어 있었다. 다방 이름은 복다방. 전화번호는 72번.
복다방에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드립커피가 항상 따뜻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핫플레이트가 없던 시절이라 레인지 위에 뜨거운 물이 담긴 네모난 철제 통이 있었다. 이 네모난 통으로 커피잔을 나란히 뉘어 열탕 소독을 하기도 했는데 대용량 커피서버를 담가 놓기도 했다. 물이 좀 식었다 싶으면 커피물을 직접 가열하는 대신 물을 데워서 커피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커피는 가루커피(분쇄된 원두커피로 멕스웰하우스 파란 철제통 커피)에 뜨거운 물을 부어 내려 놓은 아메리카노 스타일의 커피였다. 요즘의 아메리카노 커피보다는 농도가 짙어서 설탕과 프림을 타서 먹으면 맛있었다. 나이도 어느 정도 먹었겠다(중학생!), 커피는 따르기만 하면 되는데 내가 커피를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때부터 나는 원두커피를 마시기 시작했고 커피 맛을 알게 되었다.
우리 집의 복다방 시절은 짧게 끝났다. 다방 사업을 접으신 후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앙고라 토끼를 키우셨다.
복다방은 내가 서른 중반 박사과정을 할 때도 같은 자리에 같은 상호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글쓰는 수업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거리라는 주제로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발표 준비를 위해 고향을 갔다. 소설을 쓰기 위한 현지 답사인 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이후 처음 갔으니 거의 20년 만에 가 본 고향 거리에 복다방이 있었다. 철공소는 없었지만, 복다방과 복다방 옆의 우체국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반갑다 같은 감정은 없었다. 고향 거리는 소인국이 된 것처럼, 아니면 내가 축지법을 연마한 도인이 되었는지, 기억보다 좁고 낮았다. 파일을 찾아보니 복다방 사진이 있다. 사진은 찍고 싶었었나보다.
대학선배가 그랬다. 커피는 세 가지의 반전이 있는 음료라고. 쓴 맛을 설탕을 넣어 달게 마시고, 검은 색을 프림을 넣어 흐리게 만들고, 뜨거운 것을 굳이 식혀서 차갑게 마신다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드시던 커피를 만들어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프리마 한 봉지를 사면 몇 스푼 먹다가 버리게 될 것 같아 수퍼마켓만 몇 번 들락거리다 그만 두었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은 수퍼의 진열대는 병커피를 찾기 힘들 정도로 커피믹스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수제로 다방커피를 만들어 먹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보다. 이리 저리 비율을 바꿔 섞어 본들 그 맛을 찾아낼 수는 있을까. 그냥 기억 속에 그 커피가 있을 뿐.
아래 사진은 내가 찍은 복다방. 전화번호 끝자리가 72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