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자는 범인(犯人)이 아닌 범인(凡人)

[도서]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by 샘바리
이젠 잠시도 여유가 없었다.
그는 도끼를 빼내 거의 무의식적으로 양손으로 들어올려 아무렇게나, 도끼 등으로 노파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그 순간 마치 온몽의 힘이 빠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 번 도끼로 내리친 후부터 다시 힘이 확 솟았다.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를 창작에 몰두케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간질병으로 인한 병적인 집착, 인생 전체를 물들인 도박병, 충격으로 다가온 아버지의 죽음. 뚜렷하게 하나의 원인으로 귀결되지는 않지만, 그의 기구한 인생을 들여다보면 <죄와 벌>은 물론 다른 소설에 등장하는 모티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가난과 구원을 함께 손에 쥐었던 그는 <죄와 벌>의 공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어두운 도시의 이면을 낱낱이 드러냈다. 톨스토이와는 또 다른 고통과 좌절의 매력을 지닌 그의 소설은 무섭도록 현실적이고 냉혹하다. 특히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은 마치 내가 공범이라도 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작가가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서야 이렇게 생생하고 참혹한 범죄자의 심리를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충격적인 첫인상이 길고 긴 소설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타인은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 ‘비범한 사람’이 다수인가요?
저는 물론 그들을 인정합니다만, 그러한 사람들이 무한정으로 많으면 기분이 좀 두려우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초인 사상’에 심취한 병약한 대학생이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악한 소수를 처단할 권리이자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그는 전당포를 찾아간다. 전당포 노파 이바노브나는 동생 리자베타까지 착취하며 돈에만 빠져 사는 백해무익한 인물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대, 착한 두냐의 희생에 점점 스트레스를 받던 그는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는 스스로 도끼로 악을 처단하면서 선을 실행하는 역할을 하는 비범한 인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피가 솟구치는 노파의 정수리를 바라보면서 그는 극심한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그 역시 결국 평범한 인물에 불과했다. 타인의 가치를 결정하고 처단하는 역할을 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나약한 인물이었다. 반면, 새삼 라스콜리니코프는 복에 겨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냅다 성질만 내고 나가버리는 친구를 이해하고 일자리를 알아봐 주는 라주미힌, 헌신적이고 이해심 많은 동생 두냐,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의 손길을 아끼지 않는 소냐까지. 그에게 필요한 건 영웅이 아니라 이런 따뜻한 주변의 손길이었다. 그랬다면 노파를 죽이고 뉘우치는 과정의 괴로움을 생략하고 조금 더 일찍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었겠지.




소설에서는 특히 ‘문턱’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문턱에 서서 극단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엄청나게 고민하다가 그는 결국 살인을 저질렀다. 하지만 악을 처단한 후에 극악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열병에 시달리고 환각 증세를 보이던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냉철한 예심판사 포르피리에게 자수를 하고 만다. 그가 믿는 초인이라면 냉정하게 선을 행한 것에 보람을 느껴야 했지만, 그는 결국 인간이었다. 역설적으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아픔 속에서 구원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었다. 바로 대지를 상징하는 소냐의 도움 때문이다.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 창녀라는 직업을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그녀는 시베리아 유배지까지 라스콜리니코프를 따라온다. 땅에 입을 맞추고 죄를 고백하라고 주인공에 권유하는 자도 바로 사랑을 상징하는 소냐다. 과연 누가 혼란스러운 살인자의 눈물에 연민의 감정을 느끼겠는가? 결국 선을 지키는 이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생각한 단 하나의 ‘초인’이 아니라 소냐처럼 사랑의 가치를 나누는 ‘일반인’이다.


한때 칙칙한 방과 음울한 뒷골목 술집의 묘사를 보며 이질감을 받지 않았다. 이 책을 읽을 무렵인 대학교 시절 나의 익숙한 일상과 닮아있기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 비좁은 자취방은 쪄죽을 정도로 뜨겁거나, 얼어죽을 정도로 추웠지만 벌레와 (심지어!) 생쥐가 가끔씩 나타났다. 학교 후문 오르막길을 계속 따라가다보면 월 30만원(관리비 별도) 공간에서 나는 꾸역꾸역 버텼다. (나중에 알고보니 불법 창고를 개조한 방이라, 경고 딱지가 덕지덕지 붙기도 했다.)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심각한 수준의 몽상과 피해 의식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예전보다 상당히 냉소적이고 주변에 무덤덤해지곤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아무리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더라도, 환경의 영향 아래 사람은 그저 연약한 존재인 걸 느꼈다. 그래서 머리가 복잡하면, 괜히 책상을 정리하고. 별일 아닌 일에 신경질이 난다면, 기분 전환차 개운하게 샤워를 한다. 결국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개인의 노력이 가능한 선에서는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 나태함에 물들어 꼬여버린 실타래를 푸는 것도 결국 자신이다. 비범한 인물의 구원이나 선택받은 행위가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소시민의 사소한 선택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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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은 번역이 깔끔하고 정확한 느낌이라면, 민음사는 의역이 조금 더 심하지만 문장이 더 다듬어진 느낌이랄까? 저는 그냥 개인적으로 표지가 마음에 드는 민음사로 소장했습니다. 서재를 채울 컬렉션은 디자인이 8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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