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신입] 나는 살고 싶어서 남의 우울을 듣는다.

by 서희

새벽에 연락이 왔다.

첫 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지금 가라앉고 있다. 나도 그날 잠을 못 자고 있었다.

그가 우울 한 이유는 전과 비슷했다.

내가 여기서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일 분, 일 초, 어쩌면 한 시간, 어쩌면 며칠의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것이다. 끝없는 바닥인 것 같은 심연에서 상대방에게 발을 디딜 수 있는 바닥이 되어주는 것이다. 밟고 위로, 빛으로 올라가면 제일 좋고. 더 가라앉지 않고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서 답한다.

가족들은 울화통을 터뜨린다. 신경을 끄라고. 너의 치료에 집중하라고.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

언젠가 오픈채팅방을 열었던 적이 있다.

정원은 2명. 나와, 낯선 타인. 무슨 말이든 들어드릴게요,라고 썼다. 나처럼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는 누군가에게,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들어주면 그날 그 사람은 살 수 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내 이야기도 할 수 있으니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채팅방을 닫았다. 아이디도 없앴다. 익명성에 기대어 보려던 기대도 함께.

나의 우울을 살짝 보여주고 기대어 보려 하다가 호되게 혼난 경험이 있다. 나에게 도덕적 압박을 주는 것이냐. 이런 식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냐. 이러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아주 무례한 행동이라고 정색을 했다.

그 이후로 내 우울을 자세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많이 망설여졌다. 내 우울이 상대를 오염시킬 수도 있으니까. 아프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혼자 들고 있는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 이미 오염된 나는 남의 우울에 의해서 더 더럽혀지지는 않으니, 들어줄 수 있다.

기분에도 디폴트 값이 있다면, 나의 것은 허탈, 공허, 매우 우울이다.

몇 년째 야금야금 차오르더니 이제 꽉 찼다. 우울이라는 것은 가시 돋친 껍데기만 있어서, 우울로 가득 찬 나는 꽉 찬 동시에 텅 비었다. 그리고 우울의 가시가 나의 온몸을 공격한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굳이 찾아야 하는 날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굳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찾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쳐 있다는 뜻이니까.

눈을 감으면 떠지지 않기를 바라던 밤들이 있었다.

작은 알약이 그것을 막는다. 마리오네트처럼 조종당하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약은 내가 살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다.

나는 굉장히 밝고 웃긴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오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돌팔이한테 진료받은 거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웃었다.

그러니까, 나는 살고 싶어서 남을 돕는다.


그래도 답장을 썼다.

내가 받고 싶었던 것을 주는 방식으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무의식 속에서 나도 절규하고 있다. 살려달라고. 그런데 그 절규를 꺼낼 곳이 없으니까, 방향을 돌려 남의 절규를 붙잡으러 간다.

알고 있다. 이것이 악순환이라는 것도.

그래도 오늘 또 답장을 쓴다.

내 멘탈을 지키지 못하면서 남의 것을 붙잡으러 가는 이 모순을 나는 아직 설명하지 못한다.

살아 있으니까, 그저, 하는 쪽에 서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