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을 깎아 스키장을 만드는 공사 현장을 본 적이 있다.
산은 산의 모양이 아니었다. 속살이 드러난 채로 길이 나고, 흙이 쓸려 내려가고, 경사가 인위적으로 꺾였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보지 못했다. 피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는 표현이 그때는 과장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스키장을 찾지 않는다.
거창한 선언은 없었다. 다만 한 번 본 장면이 몸에 남았다.
어떤 다큐멘터리에서는 골프장을 ‘그린 데저트’라고 불렀다.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구조인데, 초록색이 그 사실을 가린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초록은 안전과 평온의 색이라고 배웠는데, 그날 이후로는 조금 다른 색으로 보였다.
그러다 우연히 ‘그린 샤워드(그린워싱)’라는 말을 알게 됐다. 환경을 생각하는 제품처럼 보이게 포장되는 방식, 말이 먼저 앞서고 과정은 잘 보이지 않는 구조에 대한 강의였다. 그 이후부터 ‘친환경’이라는 단어를 조심하게 됐다. 친환경이라는 문구를 보면 오히려 한 번 더 멈춘다.
이게 혹시, 그린 샤워드인가.
코에 빨대가 꽂힌 바다거북이, 뱃속에 비닐과 플라스틱이 가득한 채 죽은 조류와 바다생물들, 떠들썩하게 소비되는 미세플라스틱 이야기. 이런 장면들은 언제든 사람을 흔든다. 누군가는 그것을 선동이라고 부를 것이다.
나도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통계보다 장면에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는 과장처럼 보일 수 있고, 편향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걸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세상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내 쪽의 선택만 정리한다. 더 크게 말하기보다, 조금 덜 소비하는 쪽으로. 더 많은 사람을 바꾸려 하기보다, 나 하나의 방향을 조용히 조정하는 쪽으로.
모피도 마찬가지다.
대단한 가치관이 생겨서가 아니다. 생산 과정을 담은 화면을 한 번 본 이후로, 그 질감이 더 이상 단순한 상품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냥 손을 먼저 거두는 쪽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옳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본 장면이 전부는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스키가 가족의 추억일 수 있고, 골프가 관계의 언어일 수 있다. 누군가는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고, 다른 조건 속에서 선택한다. 그 맥락까지 내가 재단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거창한 결론 대신, 나를 인정하는 쪽으로 정리한다.
나는 스키와 골프를 멀리하는 취향의 사람이다.
모피 앞에서는 손이 멈추는 사람이다.
‘친환경’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게 정의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보아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내 취향을 인정하고,
남의 취향도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본 장면을 모른 척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오늘 새로운 문을 열어, 안 하는 쪽의 반대편, 하는 쪽에 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