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신입] 가난한 사랑에 나만 지쳤다.

by 서희

오랜 연애를 끝내고 나서 한동안 마음에 터널 같은 것이 생겼다.
아침이 와도 환해지지 않는 구간이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들어왔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망가진 내가 좋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오래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할 기운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는 말보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내가 출근하면 책상 위에는 늘 내가 좋아하는 샌드위치와 커피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사랑을 눌러 적은 쪽지 한 장.
나는 자주, 하루의 첫 표정을 그 자리에서 받았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날이면 어김없이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컨택트렌즈를 빼주고, 화장을 얼추 지워 주고, 사람 꼴로 만들어 침대에 눕혀 놓고 돌아가곤 했다.
직접 내 곁에 오지 못하는 날에도 그는 빠지지 않았다.
내 앞에는 늘 모범택시가 먼저 서 있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속을 달래줄 죽과 숙취해소제가 조용히 도착했다.
손편지도 자주 받았다.
짧은 날에도 반드시 무언가가 있었다.
작은 간식이든, 메모 한 장이든, 퇴근길의 마중이든.
하루하루가 소속된 이벤트처럼 지나갔다.
나는 그를 숨기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소개했다.
그런데 부끄러워하는 쪽은 늘 그였다.
나이 차이, 학벌 차이, 직업, 처지.
그런 것들이 그를 조금씩 움츠러들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괜찮았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충분히 사랑받았다.
지금 돌아봐도 그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사랑받을 수도 있구나 싶을 만큼, 자주 그리고 구체적으로.
하지만 우리 사랑은 가난했다.
처음에는 몰랐다.
가난한 사랑은 처음부터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 여유를 잃는다.
지쳐 갔던 것 같다.
어느 날부터 나는 선물처럼 귀하던 손편지에서 오탈자를 먼저 찾아내고 있었다.
무엇을 써주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틀렸는지를 보고 있었다.
한 번은 사랑한다는 쪽지를 받았다.
급하게 쓴 모양이었다.
종이를 뒤집어썼는지 뒷면에는 메뉴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부대찌개 1개
김치찌개 2개
그 정도의 흔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큰 잘못이 아니었다.
급한 하루의 뒷면에 사랑을 적어 건넨 일.
어쩌면 그 사람답고, 그 시절답고, 우리 형편답기까지 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걸 그냥 넘기지 않았다.
왜 이런 종이에 썼는지, 왜 이렇게 급했는지, 왜 사랑까지 이면지처럼 보이게 만드느냐고 매섭게 물었다.
그렇게까지 몰아세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해냈다.
사소한 것을 크게 만들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모욕처럼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는 장면을 끝장으로 몰고 가는 일을.
헤어짐은 갑자기 온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누군가 큰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작은 장면 하나를 끝까지 용서하지 않아서.
미안한 사람이 대개 먼저 그리워지는 법이지만, 어떤 관계는 그리움보다 미안함이 더 오래 남는다.
나는 그 시절을 떠올리면
샌드위치와 커피를 먼저 생각한다.
비틀거리던 밤, 렌즈를 빼주던 손도 생각난다.
그리고 끝내는, 부대찌개 1개 김치찌개 2개가 적혀 있던 종이 한 장을 생각한다.
사랑은 때로 가장 초라한 종이 위에도 적힌다.
문제는 그것을 읽는 사람의 형편일 때가 있다.
그 시절의 사랑을 나는 이제 그렇게 기억해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