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이 눈을 떴다.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일까? 조금 전까지 학수와 있었던 그는 학수의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눈을 잠시 질끈 감고 떴을 뿐인데 마치 잠을 자고 일어난 듯 머릿속이 텅 비고 약간은 어지러운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얼굴을 따뜻한 뭔가가 쓰다듬는 느낌이 들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따스한 햇살이었다. 간 밤에 열어둔 창문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며 창가에 하얀 커튼이 나풀나풀 춤을 추며 햇살이 비추었다 가리어 졌다 하며 그의 얼굴을 마치 간지럽히는 것만 같았다. 훈은 한동안 그 느낌이 좋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 채 누워만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이었다. 그러다 이윽고 정신이 들어오자 그는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에는 한 남자가 양치질을 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그의 난입에 깜짝 놀란다.
"아이고 깜짝이야. 너 노크하는 것도 몰라?"
화장실에 있던 남성은 놀란 듯 훈을 향해 소리쳤다.
"앗. 미안. 누가 있는 줄 몰랐네"
훈은 가볍게 손을 들어 미안하다는 듯 그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 빠르게 번갯불이 일어나며 기억이 채워진다.
"제이. 쏘리"
훈은 다시 방으로 돌아와 거울을 찾아보았다. 보이지가 않는다. 그러나 제이 방에 있는 전신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선물 포장을 뜯는 느낌으로 그는 심장이 쿵쾅 거림을 느끼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쳐다본다. 거울 속에 비친 그의 얼굴은 탱탱한 피부와 젊음 그 자체의 활기가 타오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간 밤에 잠을 자며 헝클어진 머리카락마저도 힘이 실려있었고, 그의 검은 눈동자 주변에는 그 어떤 주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눈썹은 그가 감탄하며 움찔거리는 얼굴 근육에 파도를 치듯 꿈틀거렸으나 이 마저도 힘이 느껴질 정도이다.
"우와"
"젊어지니 좋은가? 아니, 이젠 이런 말투는 안 어울리겠네."
어느새 학수가 나타났다. 조금 전 기억에서 붓고 피투성이로 얼룩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말끔한 얼굴이었다. 놀란 훈의 모습의 마음이라도 읽었는지 그는 장난기 섞인 웃음으로 말하였다.
"말했잖아. 이곳에서의 상처는 금방 아문다고"
"아. 그리고 아직 기억 전이라 그런가 본데"
말과 함께 학수가 그의 어깨에 잠시 손을 얹자 또 다른 기억이 그의 머리 한편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자네 오늘 늦잠 자서 시간이 없을 거야"
"앗.. 9시 수업"
훈은 순식간에 방으로 들어가 옷을 훌러덩 걸쳐 입고 교실로 뛰어가기 시작하였다.
[학생회관 in Illinoi]
수업을 마치고 훈은 제이와 언제나 그랬듯 학생회관으로 향하였다. 대학교 정 중앙에 위치한 학생회관은 오래 고풍스러운 고딕 스타일의 석재 외벽이 오랜 전통이 있음을 뽐내듯 우뚝 서 있었다. 외벽의 위로 보이는 아치형의 창문들은 정교하게 줄을 지어 나란히 장식되어있었고, 지붕 끝자락의 햇살이 비치며 고귀함을 알리는 듯하였다. 그 앞에는 광활한 들판처럼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앉아 담소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야.. 오늘 나온 과제 넌 이해했냐?"
학생회관 정문 앞으로 걸어가며 훈은 제이에게 물었다.
"많이는 못 알아들었어. 말이 너무 빨라. 프랭크 선생님은"
제이도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답하였다.
"어휴. 그 양반은 너무 자기 세상 속에 빠진 것 같아. 말끝마다. 아이돈 씽스 아이돈 씽소"
훈은 그의 발음을 흉내 내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양팔을 들며 말하였다.
"푸하하 진짜 좀 느낌이 비슷했다."
"발음이?"
"아니 그 얼굴이"
"이 녀석이"
"먼저 자리 좀 맡고 있어. 곧 애들이 올 테니.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제이는 급한 듯 손짓을 하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화장실이 있는 오른쪽 복도로 총총히 빠른 걸음으로 갔다.
"갑분똥? 크크 에라 즐똥이다"
훈은 그런 제이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건물 안에는 그야말로 에너지가 넘치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복도마다 가득한 학생들은 저마다 뭐가 그리도 신이 났는지 대화와 웃음이 섞여 울려 퍼졌다. 복도 곳곳에는 홍보 부스가 있어 한창 동아리 신입원들을 모집하는 듯 전단지를 나눠 주고 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한 학생이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복잡한 복도를 지나 안 쪽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중앙 홀이 나왔다. 200평이 족히 넘는 넓은 공간에 원형 테이블이 바둑판 위의 알처럼 놓여 있었다. 훈은 방과 후 그곳에서 모여 그의 룸메이트인 제이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수다를 떨곤 하였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학생들은 책과 노트북을 펼쳐 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고, 몇몇은 카페에서 사 온 커피를 마시며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들이 많네. 오늘은 밖에 잔디밭에서 모여야 하나?"
"excuse me"
복잡한 인파 속에 한 남자가 훈의 앞을 지나며 말했다. 180cm 정도의 키에 노란 머리카락과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이 눈을 마주치고 지나갔다.
"아시아만 동방예의지국인 줄 알았는데. 따지고 보면 미국이 더 에티켓이 좋은 것 같네"
훈은 홀로 중얼거렸다. 때마침 그의 앞 쪽 테이블에 있던 외국인들이 다음 수업이 있는지 급히 책상 위의 책들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일어났다.
"오케이 굿굿" 훈은 그들이 떠나자마자 얼른 자리로 향하여 앉았다.
"우와 지구 반대편에서 이런 멋진 곳에서 공부도 하고 멋지다. 훈"
훈이 자리에 앉자마자 그의 옆에서 학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뭐. 너도 내 기억 덕분에 미국 구경 왔네."
훈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으며 학수에게 답하자 학수는 그저 말없이 웃기만 하였다.
그때 누군가 훈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릿속이 또다시 밝아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네 명이 환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티'의 등 뒤로 '저니'와 '쭈' 그리고 '유니'가 서 있었다. 그들은 이곳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만나게 된 한국인 친구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이 독특했던 것은 미국에서 사용하게 된 영어 이름으로 서로 부르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일찍 왔네. 오늘따라 사람이 엄청 많아. 중간 고사도 다 끝났을 텐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티가 의자를 빼내어 앉으며 말하였다.
"제이는?" 훈의 옆으로 앉는 저니가 물었다. 저니는 그들 중 가장 나이가 한 살 많고 늘 그들을 한 명 한 명을 챙기는 형이었다.
"화장실 갔어요. 금방 올 거예요. 자기 혼자 맛있는 걸 먹었는지 배가 아프다고 흐흐"
훈이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다들 같이 왔네. 안녕하세요? 저니 형, 하이 쭈"
어느새 화장실에서 다녀온 제이가 빈자리에 앉으며 인사하였다.
"자, 드디어 오늘이네. 훈"
저니 형이 테이블 위에 양손을 깍지 끼며 비장함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하하 네. 오늘이 바로 거사일입니다."
"그 보스턴에서 온 여자와 당연히 약속은 잡은 거지?"
"네, 오늘도 수업 마치고 한번 더 약속 확인도 했습니다."
"이야. 이미 그린 라이트네"
티가 방긋 웃으며 말하였다.
보스턴에서 온 여자는 소연을 말하는 거였다. 보스턴에서 콜리지 과정을 마치고, 일리노이 샴페인에 살고 있는 언니 집에 약 한 달간 머무르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생회관 근처에 있는 햄버거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던 훈은 창가를 바라보며 앉아 강의 시간에 받은 프린트 물을 읽고 있었다.
"excuse me.."
그때, 그의 등 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려보니 한 여성이 서 있었다. 단발머리에 둥그런 눈을 가진 여자가 이마에 땀이 맺힌 채 근심 어린 눈빛으로 말하였다.
'예쁘다.'
훈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are you korean?"
"아.. 아네 한국 사람이에요. 그쪽도 한국 사람이에요?"
"네, 식사 중에 정말 죄송해요. 제가 아까 30분 전쯤 이 자리에 있다가 갔는데 혹시 조그마한 곰인형 열쇠고리 못 보셨어요?"
그녀는 훈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다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하였다.
"곰인형 열쇠고리요? 아... 전..."
그녀에게서 겨우 정신을 차린 훈은 주섬주섬 자기 자리를 치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테이블 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거듭 사과하였다.
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뒤로 밀어 바닥까지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열쇠고리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 역시 옆에서 함께 둘러보며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끝내 열쇠고리는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는 체념한 듯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를 하고 돌아서서 나가려 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훈은 그녀의 배낭 앞 주머니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곰인형 열쇠고리를 발견하였다.
"저기 혹시.."
훈의 말에 그녀가 뒤돌아 섰다.
"그 배낭 앞주머니에 걸려있는 게 찾고 계신 곰인형 열쇠고리 아닌 가요?"
그녀는 황급히 둘러매고 있던 배낭을 앞으로 내어 확인하였다. 마침 보물을 발견한 듯 그녀는 열쇠고리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 이윽고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깨달은 듯 얼굴이 새 빨게 졌다.
"평소에 휴대폰에 걸어두었는데 제가 케이스를 바꾼다고 배낭에 잠시 걸어 둔걸 깜빡하고..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저는 손에 휴대폰을 쥐고 정신없이 찾은 적도 있는걸요"
훈은 그녀가 민망하지 않도록 웃으며 말하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사죄의 뜻으로 커피라도 대접을 하고 싶은데. 아직 식사가 안 끝나셨다면 연락처라도 주신다면 나중에.."
"식사는 이미 다 마쳤습니다. 마침 저도 과제 때문에 커피숍을 갈지 도서관을 갈지 고민 중이었는데 가시지요."
훈은 기회를 놓칠세라 그녀가 답하기도 전에 가방에 프린트물을 집어넣었다.
"여기 학생이신 가봐요. 아까 처음에 영어 발음 하실 때 원어민인 줄 았어요. 하하하"
훈은 그녀와 길을 걸으며 시답잖은 말을 하며 웃었다.
"아니에요.." 그녀는 수줍은 듯 대답하였다.
"커피는 제가 살 테니, 영어를 좀 하시는 것 같은데 제 숙제 좀 도와주시죠"
그렇게 그들은 그날부터 종종 만나기 시작하였다. 훈은 과제나 시험 준비로 온갖 핑곗거리를 만들며 그녀와의 만남을 연명해 나갔고, 8번 정도 만났을 때, 마침내 그녀에게 고백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