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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상 Nov 17. 2024

#17.기억 망원경

#파노라마 #소설 #기억망원경 #잔상

[딸 희은이의 집 앞]
"상처가 이런데 손자를 보러 가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 케이크도 결국 가지고 오지도 못했는데."
훈은 주차된 차 안에서 백미러를 통해 자신의 얼굴 상처를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퉁퉁 부은 얼굴과 곳곳에 얼룩진 핏자국들이 거울에 비쳤다. 손 끝에 닿는 피부 곳곳이 마치 못에 박힌 것처럼 팽팽하게 경직되어 얼얼하고 통증이 밀려왔다.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이곳은 자네의 기억일세. 즉 이미 일어난 일이라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네의 상처를 알아보지 못할 걸세. 또한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저승사자들의 결계 밖으로 나가는 거라 자네 집사람도 좀 전의 일은 기억도 못할 거야. 그리고..."
학수는 잠시 말을 끊더니 뒷 좌석에서 하얀 상자를 꺼내어 훈에게 내밀었다. 
"그렇기 때문에 케이크는 이렇게 따라왔지. 실제로도, 자네의 기억으로도 케이크를 가져간 것은 사실이니깐"
"아.. 아니 이걸"
훈은 학수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 역시 얼굴이 부어있었고, 심지어 한쪽 눈은 붓기로 인해 뜰 수 없었다. 
"자네.. 괜찮나?"
"벌써 잊었는가? 우리는 이미 죽었다네. 상처도 우리가 생전의 기억 때문에 생긴 거지만 금방 아물 걸세."
학수는 안경이 없었지만 버릇처럼 중지를 콧등으로 가져간다. 
"자 그럼, 내 걱정일랑 하덜 말고 다녀오게"

훈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차에서 내렸다. 소연은 어느새 차에서 내려 그에게 손 짓 한다. 그 역시 조심히 차에서 내렸다. 그러다 다시 문을 열고 학수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도 같이 가지 않겠는가?"
"내.. 내가?"
갑작스러운 훈의 제안에 학수는 놀란 듯 한쪽 눈을 번쩍 뜬다.
"그래.. 내 손자 보러 가는 건데. 자네에게도 보여주고 싶네만. 어떠한가?"
학수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잠시 망설이더니 차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따사롭게 그들의 피부를 감싸며 경직되었던 근육들이 조금씩 풀리는 듯하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며 콧등을 지나가 왠지 모를 전율이 흐르며 훈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렇게 아파트 입구로 향하던 그때, 먼발치에서 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할아버지가 있네!"
딸 희은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딸 희은과 그 옆에는 얼마 전에 이발을 한 듯 밤톨 같은 머리카락에 딸을 닮아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사내아이가 서 있었다. 그는 잠시 수줍은 듯 엄마의 다리 뒤로 숨는다.
"아이고, 우리 민우야!" 훈은 그 자리에서 허리를 굽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반갑게 손자를 불렀다. 그 순간만큼은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어떠한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였다. 그들은 가까워지고 마침내 손자는 훈의 품에 안겼다. 손자는 처음에는 쑥스러운 듯 안겼으나 훈의 따뜻한 품이 싫지는 않았는지 이내 조그마한 두 팔을 벌려 훈의 어깨 위로 사뿐히 안았다. 
"어이구 우리 손자. 잘 있었어? 할아버지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 줄 알아?" 
훈은 그의 볼을 손자에 볼에 갖다 대어 비비며 무한 애정을 쏟아 내었다.
"아니, 아버지. 나는 잊으셨어요? 딸보다 손자를 더 챙긴다니깐. 변했어. 우리 아빠."
불만 아닌 불만으로 희은이 웃으며 말했다. 옆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소연은 말없이 웃으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순간 손자를 통해 훈의 머릿속이 따뜻해지며 그의 기억의 일부분이 밝혀지고 있었다. 
훈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손자를 안아 올리더니 옆에 서 있던 학수에게 손자를 소개해주었다.
"인사해. 내 손자일세"
학수는 수줍은 듯 훈의 손자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놀리듯 말한다.
"손자가 다행히도 지할아버지를 안 닮아 잘 생겼구먼. 허허허"
"에끼 이 사람아. 어디를 봐도 딱 나랑 붕어빵이지."
훈도 지지 않는다. 

놀이터에 위치한 벤치에 나란히 앉은 훈과 학수 사이에 약간의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러한 어색함과는 달리 놀이터에서는 훈의 손자는 미끄럼틀에서 미끄러지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소연과 딸 희은도 함께 따라 웃는다. 
"괜찮겠지?"
훈이 어색한 공기의 흐름을 끊으려 말을 먼저 꺼내었다.
"뭐가?"
"..."
"자네도 참. 그렇게 걱정할 거 없네. 어차피 다음 기억으로 넘어가면 그들도 쫓아오기 힘들어"
"하지만 이번 기..."
"그래 아무래도 지난번 기억 때문에 흔적이 남아 좇아온 것 같네. 하지만 이제는 우리도 이 사실을 아니 뒷문으로 들어가듯 조심히 이 기억을 빠져나가면 되네. 너무 걱정 마"
학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였다. 
"정말 무슨 일인지 말 안 해줄 텐가?"
"당연히 자네도 알게 될 걸세. 그런데 지금은 때가 아니야."
"흠..."
잠시동안 침묵이 흐른다. 그러다 놀이터에서 훈을 향해 손자가 흔드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훈도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참으로 보배 같은 아이로 구먼."
분위기 전환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학수는 얼른 말하였다.
"그렇네. 희은이를 가졌을 때처럼 너무도 기뻤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훈은 가슴이 뭉클해져 말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깨달았네. 이번 기억의 의미를"
"오, 그래? 그게 무엇인가?"
"바로 자네였네."
"응?"
학수는 잘 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 어쩌면 제대로 들었으나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한번 물어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까 손자를 안을 때 기억이 들어왔네. 내가 손자를 만나 안던 그날, 자네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는 것을."
"이런 싱거운 사람 같으니라고"
"아니, 사실일세. 사실 아까 손자를 안아줄 때 동시에 기억이 들어온 게 있는데 딸 희은이를 가진 날에도 그랬어. 우리 예쁜 딸, 우리 잘생긴 손자 내가 아끼던 절친인 자네가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일세"
"..."
"자네는 내가 아끼던 정말 소중한 친구였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철없던 시절이었지만 가장 그리운 시절이기도 했던 그 시절에 자네가 내 평생에 가장 그리운 친구였다네. 죽는 그날까지도 자네를 몹시 그리워했다고."
훈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학수를 바라보았다. 학수는 아무 말 없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훈의 손자를 바라보며 알 수 없지만 훈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있던 천국은 말이야. 우리가 이승에서 살았던 것처럼 각자의 집이 있어. 그 집의 모양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가 있네만 난 1층짜리 한옥집에서 살았지. 어린 시절 할머니 댁이 그러했거든. 국민학생이었던 내 키만 한 담벼락,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전봇대. 그 낭만이 있거든. 하하."
"응? 천국? 천국에도 그런 집이 있는가?"
"그렇지. 천국에도 내가 살 수 있는 집이 다 있어. 내가 원하는 모양의 집에서 살 수가 있다네."

"그런데 각자의 집 에는 망원경이 하나씩 놓여 있다네. 왜 우리가 잘 아는 별을 볼 때 쓰는 하얗고 길쭉한 망원경 말이야. 우리 집의 경우에는 앞마당에 그 커다란 망원경이 놓여 있었지. 땅바닥을 받치고 있는 시커먼 삼각대 위에 놓여 하늘을 향해 올려져 있었는 데 매번 작동되는 것은 아니야. 우리가 가져온 구슬을 넣고 그 추억을 보거나 아니면 특별한 날에만 그 망원경을 통해 내가 살던 이승의 사람들을 볼 수가 있다네."
"특별한 날?"
"그렇네. 그 망원경 몸통 중간쯤에 보면 청록색의 불빛이 들어오는 버튼 모양이 하나 있어. 이승에 산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고 추모할 때면 망원경에 불이 들어온다네. 그러면 망원경을 통해 그들이 말하는 그 추억들을 함께 볼 수가 있는 거야"
학수는 마른침을 삼키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자네가 우리 부모님 다음으로 나와의 추억을 많이 되새기곤 했지. 참으로 내가 민망할 정도로 자네는 나를 많이 그리워해 주었고, 자네 부인인 소연 씨도 마치 내가 옆에 있는 사람처럼 잘 알게 된 것 같더구먼."
"허허. 자네가 그렇게 볼 줄 알았다면 욕은 하지 말 걸 그랬어. 허허허"
"에끼. 이 사람 안 그래도 내 흉을 본다 치면 내 한소리 하려 했다네"
그들은 함께 웃었다. 마치 그들이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그들처럼 말이다. 

"그게 무척이나 고마웠네. 나를 그렇게나 소중히 여겨준 것이. 그래서 내가 이렇게 천륜을 깨고 자네를 마중 나온 걸세"
"자네도 참 대단해. 오랜 시간을 날 잊지 않고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니"
"아.. 조금 다른 얘기이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은 자네가 살던 이승과는 좀 다르다네.  과거와 미래 모든 시간들이 섞여 있네"
"응?"
"그건 어차피 차차 알 테니 되었고, 암튼 저 어여쁜 손자. 나도 그날 자네가 나를 떠올려 주던 덕분에 잘 보았다네. 고맙네"

"하라.. 버디"
놀이터에서 훈을 부르는 작고 귀여운 손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푸른빛이 감돌며 그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훈은 그 빛 너머에 있는 손자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의 손자 역시 조막만한 손바닥을 펼쳐 흔들었다. 어느새 그들 앞에 온 푸른빛은 둥그런 구슬모양으로 바뀌었다. 
"세 번째 구슬이구먼."
훈과 학수는 구슬과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자, 다음 기억으로 어서 가자고."
"정말 괜찮겠지?"
"우리가 어느 기억으로 가는지는 그들도 쉽게 알 수는 없을 거야. 아무래도  지난번 기억 초기화가 되면서 눈치를 채고 쫓아온 것 같네만 이번에는 흔적을 남기지 말고 가면 될 것 같네."
"그래.. 어서 가세."

그들은 벤치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잠시 후, 학수가 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엄지와 중지를 큉기자 연기가 되며 사라졌다. 얼마 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커다란 덩치의 두 남자가 나타났다. 그들 중 한 명이 훈과 학수가 있던 벤치 위에 조그마한 셋톱 박스 같은 것을 올려놓았다. 검은색의 셋톱 박스는 알루미늄으로 감싸져 있었고, 크기는 손바닥 만한 직육면체 모양이었다. 그 뒤로는  기다란 안테나 두 개가 달려 있었다.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남자가 그 장치를 작동시키더니 그 뒷면에 케이블 선을 꽂고 모니터를 연결하여 보기 시작하였다. 
"형님..."
"그래.. 우리도 따라가지. 흔적은 잘 지우고"
"네 형님"
그들은 김혁과 최진만이었다.
그들 역시 얼마 후, 연기처럼 사라졌다. 사라지는 순간에도 김혁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생각하였다.
 
'분명..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데.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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