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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비 Dec 14. 2023

몸은 기억한다

트라우마에 관한 모든 것

이 책은 트라우마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베셀 반 데어 코크 박사가 1970년대부터 수십년간 연구해 온 트라우마에 관한 방대한 연구를 집대성한 책이다. 일단 두께부터 압도적이고 주제도 무거운 책이지만 막상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면 놀랍게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흡입력이 있고 재미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 과학서나 연구서처럼 주제에 관한 연구 내용만 나열한 것이 아니라 저자인 코크 박사가 대학 시절부터 겪은 자기 자신의 경험이나 만났던 내담자들의 스토리를 굉장히 현실감 있게 마치 자전적 소설이나 몇 편의 영화를 묶어 놓은 것처럼 흥미 진진하게 엮어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한 번 읽고 내용이 파악될 만큼 만만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심각하고 어려운 실험과 연구 사이 사이에 저자의 실제 경험과 사례를 소설처럼 묘사해 놓은 것은 좋은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책의 진가는 두번째 세번째 읽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트라우마에 관한 연구 내용들이 눈에 들어오고 이 모든 내용이 정말 의미심장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책의 앞부분은 코크 박사의 대학 시절과 대학원 시절 트라우마 연구 분야에 입문하기 시작했던 이야기가 마치 자전적 소설처럼 그려지면서 은근슬쩍 트라우마 연구의 역사에 대해 그려진다.  그리고 나서는 트라우마의 증상들과 관련 연구들, 어린시절의 트라우마,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트라우마 치료에 관한 내용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담겨 있다. 


트라우마 연구의 역사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사람들이 트라우마에 관한 증상들을 단지 미친 사람으로 치부하며 약물이나 물리적으로 제압하는 방식으로 트라우마를 대처했다고 한다. 차츰 트라우마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겉으로 보기에 단지 미친 것 같은 증상들이 사실은 어린 시절이나 과거에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후 정신이 왜곡되어 나타나는 트라우마 증상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책이 가장 힘을 주어 강조하는 내용은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사람의 정신을 병들게 만드는 기저에 신체의 변화가 있다는 점이다. 충격적인 사건은 몸에 흔적을 남긴다. 특히 뇌에 흔적을 남긴다. 만약 충격적인 사건이 아주 어린시절에 겪은 것이라면 그리고 그 사건이 오래도록 지속된 고통이라면 그 사건은 뇌에 단지 흔적만을 남기는 게 아니라 아예 뇌의 모양과 구조마저 변형시켜 버린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 지속적인 정신적 충격은 뇌 안의 경보 시스템인 편도체를 크고 예민하게 만든다. 그러면 너무 과각성되고 비대해진 편도체가 시도 때도 없이 뇌 안에 경보음을 울려댄다. 그래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트라우마 환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상황에서도 마치 심각한 사건을 겪고 있는 사람처럼 공격적으로 굴거나 반대로 얼어붙어 버리거나 도망가 버리는 방식으로 이상하게 행동한다.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 받기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단절되고 고통은 지속된다. 


이 책을 통해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사건이 뇌에 흔적을 남기고 그렇게 달라진 뇌로 또다른 힘든 사건들을 끌어들이게 되는 과정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상대방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성찰하게 만드는 재미있고 유익한 책이다. 두껍고 부담되지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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