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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꽃psy Mar 18. 2022

딸의 첫 미역국과 반찬가게의 반찬

특별할 것 없는 마흔다섯 살의 조촐하고 행복한 생일상

5년 전이었나, 남편이 내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준 적이 딱 한번 있다. 남편은 라면 말고는 제대로 할 줄 아는 음식이 없다. 결혼 15년 차임에도 이렇다는 건 명백히 내가 잘못한 것이다. 그래도 뭔가 배워보겠다고 몇 년 전에는 평생교육원 요리교실을 등록하더니  번 가고는 요리는 자신과 너무 맞지 않는다며 가지 않았다. 남편 요리를 잘할 기회와 시간과 인내심을 더 가졌어야 했다. 나도 요리 잘하는 남자 참 좋아하지만... 현실은 라면 취향도 달라 남편이 끓여주는 푹 익은 라면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남편이 무슨 바람이 들었나 미역국을 끓여주겠다 한다. 그래도 먹어본 세월이 있는데 기본은 할 것이라 생각했다.  생일 전날 주방에서 국을 끓일 준비를 한다.

"여보~~! 냄비는 어딨어?" 

가 시작이었다. 질문의 시작.

"여보~! 미역 어딨어?"

 "미역은 얼마나 해야 해?"

 얼마큼? 마늘은? 간장은? 고기는 어떻게? 등등 몇 분 간격으로 계속 여보~! 를 불러댄다.

"하..... 이럴 거면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지"

이를 악물고 올라오는 짜증을 누르며 찾아주었다. 눈동자만 굴리면 다 보이는구먼 그걸 못 찾고 자꾸 불러댄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나름 신이 난 모양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하는 모습에 나는 어이없는 웃음이 났다. 자신이 생전 처음 미역국을 끓이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스스로 대견한 모양이었다. 비주얼과 맛이 궁금했지만 일단 생일 아침에 먹기로 했다.


생일 아침, 남편은 내게 앉아있으라 한다. 다행스럽게 전기밥솥 밥은 할 줄 알아서 밥은 아주 잘 되었다. 밥과 하얀 국그릇에 국을 한 대접 떠온 것을 보니 일단 비주얼부터 음... 먹고 싶은 생각이 지 않았다. 국에 간장을 얼마나 넣었는지 간장에 물을 풀어놓고, 미역을 불려놓은 것 같았다. 그래도 나를 위해 생전 처음 미역국을 끓인 성의가 있으니 먹어봐야 한다.


간을 진간장으로 했나 보다. 달고 짜고 이상하고 너무 맛이 없어 몇 숟갈 먹다 말았다. 아이들도 색도 맛도 이상하다며 먹지 않았다. 남편도 맛이 없는지 본인도 조금 먹고는

"그래도 처음 한 거 치고는 괜찮지 않아?"

하며 뭔가 칭찬의 말을 기다리는 눈빛이다.

"어. 괜찮지 않아. 고생했지만 다음엔 그냥 오뚜기 미역국으로 해 줘."

라고 나는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날 오후, 생일인 막내딸을 찾아오신 엄마는 그 시커먼 미역국을 보고 그래도 사위가 딸을 위해 미역국을 끓였다는 게 기특한지  대신 맛있다는 칭찬을 하시며 먹어주셨다. 그 후, 남편은 내 생일에 미역국을 끓이지 않았고, 나도 우리 식구들의 맛있는 한 끼 권리를 위해 굳이 바라지도 요구하지 않았다.




어제 아침밥을 먹으며 남편이 이번 생일에 오뚜기 미역국을 끓여주겠다고 하  딸이 미역국은 자신이 끓일 것이라 했다.

(자가격리가 해제되었답니다^^) 아직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지만 엄마를 위해 요리 유투버들을 많이 보아서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그러자 남편은 나를 보며 말한다.

"그럼 반찬은 당신이 항아리 가서 먹고 싶은 거 몇 가지 사다 놔~ 아침에 내가 차려줄게."

그냥 그러기로 한다. 저녁에 반찬가게 가서 두부조, 소고기 장조림, 진미채, 꽈리고추 무침 4가지 반찬을 샀다.


예전, 30대에는 친구들이나 sns 속 사진들을 보며 다른 남편들이 아내에게 하는 것이 부러웠다. 몇 번째 생일에 무엇을 받았네, 남편이 생일상을 이렇게 차려주었네 하는 등의 사진을 보면 나랑 비교가 되었다. 난 그들과 비교하면 그만큼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았고, 내 생활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 남편은 명품백을 사줄 만큼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아니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위해 깜짝 이벤트 따위를 하는 사람도 아니다(아주 가끔 소소하게는 했던 것도 같다). 그냥 성실히 직장 생활을 하여 월급을 받고  약간의 고리타분함 속에서 적당히 애처가인 척을 하고, 약간의 꼰대스러운 면이 있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대한민국 남자이다.


그런 그가 요리에는 관심도 취미도 감각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생일이라고, 결혼기념일이라고 특별한 식탁을 기대하지 않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것을 잊어버리고 나도 모르게 뭔가를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던 시간들을 보내고 지금까지 평범하게 부부생활을 유지해 왔다.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그냥 내가 끓여먹는 게 더 맛있고 편하다. 그래도 반찬을 사다 놓으면 차려주겠다고 하니 그것으로도 괜찮다. 못하는 사람에게 잘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냥 할 수 있는 것을 하게 두는 것이 더 평화로운 법이다.


어젯밤, 딸아이는 유튜브에서 본 레시피와 엄마의 레시피를 물어가며 미역국을 열심히 끓여 놓았다. 오늘 아침, 남편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접시에 예쁘게 반찬을 담고 나름대로 상을 차렸다.

특별할 것 없는 마흔다섯 살의 생일 아침, 딸아이가 끓여준 미역국과 반찬가게 사장님이 해 주신 반찬으로 남편이 차려준 식탁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는 아침식사를 했다.  약간 짜긴 하지만 열네 살짜리가 소고기를 넣고 끓인 첫 미역국 너무너무 맛있다. 조촐하지만 맛있는 생일 아침밥 덕분에 오늘 특별하고 행복한 하루를 만들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하워드 가드너 교수는  "불행한 사람은 갖지 못한 것을 사랑하고, 행복한 사람은 갖고 있는 것을 사랑한다"라고 했다. 30대 시절의 나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보며 남을 부러워했지만, 40대의 나는 내가 가진 것을 찾으며 행복을 만든다. 요리도 못하고, 이벤트로 나를 놀라게 하는 재주는 없는 남편이지만, 내 남편이 가진 다른 많은 좋은 점을 더 찾으며 사랑하며 행복한 내가 된다.

엄마를 위한 딸의 미역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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