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새싹같은 초록 구두가 너무 예뻐보였다. 나도 초록 새싹처럼 쑥쑥 자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 몇 번 신게 될지 모를 초록 구두를 충동구매 했다. 그리고 정말 딱 한번 신고는 신발장에 모셔두었다.너무 튀는 색 덕분에 옷과 맞추기도 어려웠고, 그 구두를 신으려면 묘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일년이 지났다.
며칠 전, 편한 분들과 독서 모임이 있었다. 아무거나 걸치고 나가기엔 봄날이 너무 찬란하게 좋았다. 그렇다고 격식있는 차림원피스는 딱딱하다. 할렁한 롱원피스에 얼마전 새로 산 레트로 느낌의 청자켓을 입었다. 그리고 신발장을 열어 초록색 구두를 꺼내신고 거울을 봤다. 신발색이 좀 과한 듯하지만 뭐 봄이니까, 쨍하게 맑은 날이니까 그런 봄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독서모임을 하고 집에 오니 딸아이가 와 있었다. 내향형의 딸은 두얼굴을 가진 아이다. 밖에 나가서는 말도 거의 하지 않고 사람들과 친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하지만 집에서는 특히, 엄마인 내게는 말을 많이 하고 팩트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한다.딸아이는 아직 멋을 내거나 이성에게도 관심이 없는 무뚝뚝한 중학생이다.
그때쯤 나는 관심가는 남학생도 있었고, 예쁜 모습에도 관심이 많았다.잠을 많이 자서 쌍거풀이 풀린 날에는 하루종일 거울보며 신경 쓰고 그랬다. 그러나 딸아이는 무채색의 옷만 고집하고 외모에도 관심없고 베이킹 연습과 그림, 웹툰에만 관심을 갖는다. 머리카락이 뻣친채 학교를 다니고, 앞머리가 눈을 찌를 것같은 모습에 앞머리를 자르라는 잔소리를 틈날 때마다 하고 있다. 차라리 화장을 하고 거울보며 시간을 보내는 아이라면 내가 잔소리를 덜 할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외모에는 관심이 없는 딸이지만 엄마가 입는 옷에는 관심이 많다. 행여나 엄마가 너무 튀는 옷을 살까, 너무 쨍한 색의 무엇인가를 하고 다닐까 신경을 쓰곤 한다.엄마의 옷에 잔소리를 하는 덕에 어느새인가 나는 무엇인가를 사기 전에 딸아이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얼마전 내 눈에 너무 예쁘지만 딸은 너무 튀고 별로라고 했던 보라색 원피스를 샀다가 딸아이는 기겁을 했다. 입어보니 내게 너무 어울리지 않았고, 나도 그 이후 딸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기로 했다.
집에 온 딸아이는 현관의 신발을 보더니 한마디 한다.
"엄마! 설마 이 구두 신고 나간거야?"
"응. 왜? 너무 튀긴하지?"
"응. 솔직히 별로인데 그래도 엄마니까 괜찮아. 어울려. 근데 엄마는 가끔 패션테러리스타 같아."
"뭐? 내가?? 패션테러리스트???"
"아니, 패션테러리스타. 엄마는 약간 패션테러리스트가 패셔니스타가 되고 싶어하는 것 같아"
나는 딸아이의 이야기에 빵 터져서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그건 나도 인정하는 바였다. 예쁜 것을 좋아하고, 옷에 관심이 많지만 꽃무늬나 레트로 스타일을 좋아하는 독특한 취향 덕분에 가끔 친한 주변인들로부터 패션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때로는 입고 싶은 옷이나 악세사리, 신발 등에 과감한 내게 어떤 이들은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독서모임의 한 선생님도 신발을 보고는 어떻게 그런 신발을 사냐고 그런 것을 신는 용기가 부럽다고 했다. 대리만족 시켜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나는 그저 웃다가 내게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며 날씨가 이끌어줬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감각이 좋아 옷을 잘입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내가 입고 싶은 것을 입되, 상황에 맞게 입으려 노력은 한다. 때로는 단정하고 조신하게 입고, 때로는 현란하기도 하고 때로는 추레하고 초라하다. 어릴 때에는 옷이나 가방, 악세사리, 신발 이런 것과 나를 동일시하여 비싸고 좋은 것들로 나를 표현하고 부족한 나를 감추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는비싸고 좋은 것보다 나와 어울리는 것들이 좋다. 주로 단정한 모습이지만 가끔은 되도 않는 멋을 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패션테러리스타가 되기도 한다. 딸아이가 말한 패션테러리스타는 나와 어울리는 괜찮은 표현인 것 같다.이왕 이렇게 패션테러리스타가 되었으니 봄을 닮은 초록구두를 몇 번 더 신고 봄을 더 만끽해야겠다. 이제 초록이 더 많아질테니 봄과 더 잘 어울리겠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