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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꽃psy May 28. 2022

여자와 엄마, 그리고 나

정리하지 못한 보고서만 열댓 개.

평소의 나였다면 해야 할 일들을 3일을 넘기지 않았지만 이번 달의 나는 무기력과 허무함이란 감정을 느끼고 있어 휴식 시간이 필요했다.  일이 밀리게 되면 쌓인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쌓이는 것이 싫었지만, 뭐 내가 안 했으니 이번 주말은 밀린 일들을 모두 해야 한다. 밀린 일들을 해야 해서 부담스러운 주말이지만 오늘은 토요일, 좋아하고 기다리던 드라마 두 편 모두 방송하는 날이라 그래도 기분이 좋다. <우리들의 블루스>, <나의 해방 일지> 그 두 편을 보는 것도 내게는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일을 마치고 일찍 오면 잠깐 숨을 고를 시간이 되지만, 외각의 일을 마치고 오면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저녁 준비집안일을 해야 한다. 아니 어떤 날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주방으로 간다. 어떤 날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지만 어떤 날은 문득문득 화가 났다. 남편이라는 상대에게.


같이 살고, 같이 일하는데 왜 집안일은 내가 더 많이 해야 하고 나의 책임인가. 물론 서로 해야 할 일은 정했지만 쓰레기 버리기와 빨래 개는 것 두 가지만 남편의 일로 정하고 매일 해야 하는 하는 것도 내 몫이고, 소소하게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도 모두 내 몫이다. 문득문득 화가 나고 억울한 감정이 수시로 올라왔다. 요리도 내가 더 잘하니까. 화분도 다 내가 샀으니까. 화장실 청소도 내가 더 꼼꼼하게 하니까. 빨래 구분 없이 돌리는 게 싫으니 빨래도 내가 골라 돌리는 게 낫지. 등등 내가 해야 하는 당위성 아닌 당위성으로 가사가 돌아간다.


나는 아이들의 밥이 우선순위기에 약속을 잡을 때에도 미리 동의를 구한다. 하지만 남편은 내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거의 매일 늦은 귀가를 한다. 늦은 귀가 후 할 수 있는 집안일은 없다. 식사 준비도, 청소도, 설거지도, 깁스한 아들 씻기는 것도, 수시로 빨래를 확인하고 돌리는 것도 다 내 일이 된다. 별거 아닌 일로 감정 상하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되고, 내 목소리가 커져 아이들이 불안한 상황이 되는 것이 싫어 남편과의 상황을 회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꾸 불만과 스트레스가 쌓여다.




그리고 문득문득 겁이 났다. 내 딸이 내 모습으로 자라게 될까 봐. 내 아들이 아빠처럼 자라게 될까 봐. 나는 좀 더 자상하게 집안일을 함께 하는 남편과 아이들의 아빠 모습을 상상했지만 내 현실은 아닌 삶이다. 보고 자라는 아이들이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하는 일>로 인식될 까 걱정이 되었다. 아들을 불러 집안일은 엄마나 여자 일이 아닌 함께 서는 가족 모두가 함께 해야만 하는 일이라 애꿎은 훈계를 해댔다. 누나가 시키는 심부름에 불만 갖지 말고 하라 이야기했다. 가족 구성원으로 그 정도는 해야 할 의무임을 강조했다. 남편에게 하고 싶던 이야기를 어린 아들에게 하고 있는 나를 아이에게 교육해야 할 중요사항이라 변명했다.


 내 생활과 인식 속에 <여자의 삶>이 서글프고 억울한 삶으로 남을까 걱정되었다. 분명히 엄마세대에 비해 훨씬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자와 엄마의 삶은 고달프다.

요즘 굳세게 기다리며 보고 있는 <나의 해방 일지>에서 지난주의 이야기는 가슴이 턱 하며 깊은 울음이 나왔다. 지난주는 구 씨와 미정이가 아닌 엄마의 삶과 죽음에 나는 마음이 많이 갔다.


억세고, 굳세고, 가족들 사이에서 눈치 보고, 늘 전전긍긍 균형 잡던 엄마. 그리고 집안일에 바깥일에 아이들 일에 힘겨운 울분. 일주일에 하루라도 휴식을 갖기 위해 다시 교회라도 가야겠다는 엄마는 결국 그 주 교회에도 가지 못했다. 가스레인지 위의 밥솥과  갑작스러운 차가운 뒷모습에 난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죽어서야 해방되는 여자와 엄마의 삶. 다들 이름이 있었지만 엄마의 이름은 죽고 나서야 겨우 유골함에 이름 곽혜숙을 보여주었다. 엄마의 이름을...

엄마의 환한 웃음

나도 여자와 주부와 엄마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감사하게 박소영이라는 이름이 자주 불리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해 준다. 그래서 가끔 '이기적인 내가 되는 것'을 수용했다. 나는 딸이나 아내나 엄마가 아닌 그냥 나도 있는 거니까.


내가 모두 건사하고 사는 줄 알았다던 삼 남매의 아버지 염제호가 아내의 죽음 이후 아내의 역할과 빈자리가 크고 아내 덕분에 온 식구가 불편 없이 살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음을 고백하던 장면에서 나를 생각한다. 나도 내가 모두 건사한다고 착각했던 것일까. 


여자도 남자도, 아내도 남편도, 엄마도 아빠도 모두 자신의 역할을 하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서로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상대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나도 어쩌면 내 모습만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만 억울하다 생각했는데 어쩌면 남편도 나에 대한 불편감이나 억울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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