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먼저 느끼는 슬픔이 있다.
11월 28일이 지난 지 5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 11월 28일은 나의 첫 출산일이었다. 난 소고기 미역국을 끓였다. 하지만 지금 내 아들, 딸의 생일은 아니다. 아마 건강하게 컸다면 15살이 되어서 나의 속을 지글지글 볶았을 중2 아들이 둘이나 있었겠지...
첫 출산은 쌍둥이, 아들이었다. 만 28주 만에 예고도 없이, 준비도 없이, 둘이 있기에는 엄마 뱃속이 너무 좁았던지 세상으로 나오고 말았다. 출산의 기쁨을 느낄수도 없이 안아보지도 못한 채, 두 아이들은 인큐베이터로 들어가 보이지도 않을 혈관에 몇 개의 바늘을 꼽았는지도 모르겠다.
678g, 720g. 내 팔뚝보다 작아보였다.
난 1kg도 되지 않는 작은 아기는 처음 보았고, 그 작은 몸에도 있을 것이 다 자리 잡고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리고 나는 매일 눈물만 났다. 하루 2번 부모만 허락되는 중환자실 면회시간만 기다렸고, 울지 않으리라 매번 다짐하고, 결심하고 들어갔다. 하지만 인큐베이터에서 눈도 못 뜨고 손, 발, 머리, 심장, 배 보이는 곳에는 전부 주삿바늘인 작은 아기들을 보면 눈물은 그냥 줄줄 흘렀다.
종교도 없는 나는 매일 하느님, 부처님, 조상님 신들께 기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우는 것과 기도뿐이었다. 하지만 내 아이들과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큰아이는 세상으로 나온 지 20일, 작은 아이는 50일 만에 더는 아프지 않을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한 번도 안아보지 못했던 두 아이들 모두 주검이 되어서야 겨우 안아볼 수 있었다. 겨우 1kg을 간신히 넘긴 아기는 너무 작아서 이렇게 작은 아기를 보내야만 한다는 게 너무 힘이 들었다.
그렇게 난 슬픔의 밑바닥이 어딘지 모를 만큼 아팠고, 울어도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슬픔이 아니었다.
큰 아이를 하늘로 먼저 보내고, 작은 아이가 인큐베이터에 있을 때 의사 선생님이 이야기를 했다. 이 아이는 만일 인큐베이터에서 나와도 건강한 아이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시신경쪽이 약해져서 시각장애를 가질 수도 있고, 다른 몸의 장기나 뇌 발달도 늦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때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난 장애아의 부모로 살기 너무 힘들 것 같다'는 현실적인 생각이었다. 남편은 아이에게 우리가 눈 한쪽씩을 이식해 주고 살면 아이는 괜찮고, 우리도 불편하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난 동의했지만 무섭고 너무 두려웠다. 내가 장애를 갖게 되는 것도, 장애아의 엄마가 되는 것도 너무너무 무서웠다.
그 상담 며칠 후, 너무 작은 아이는 형아가 있는 하늘로 떠났다. 다른 인큐베이터의 아이들은 점점 커가는데 내 아이 둘은 모두 하늘로 가버렸다. 하느님에게 분노했고 조상님을 원망했고, 내가 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큰 벌을 받을 만큼 난 큰 죄를 짓고 살지 않았는데 왜 이런 큰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나를 괴롭게 만든 건 죄책감이었다. 장애아의 엄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아이가 알아버려서 나를 떠나갔을까 싶은 마음에 난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 나도 모르게 두려움으로 내 마음의 끈이 먼저 끊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죄책감이 슬픔보다 나를 더 억눌렀다. 그 후로 나는 가끔 꿈을 꾸며 베개가 다 젖을 만큼 울다 깨고,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옆에 자던 남편은 놀라 깨고, 내가 악몽을 꾸었다고만 생각한다.
가면을 쓰고 살아야 했다. 슬픔과 죄책감 속에서 살게 되면 나의 사랑하는 다른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했다. 주변인들은 나를 불쌍히 여겼고 가엽게 보았다. 매일 울던 울음이 점차 잦아들었고, 슬픔도 아픔도 죄책감도 조금씩 줄어들며 예쁜 남매가 나에게 와주었다. 하늘의 쌍둥이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모습으로 내게 와주었고, 똑 닮은 두 살 터울 남매에게 가끔 쌍둥이냐고 묻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15년이 지났지만 아직 난 눈을 감으면 주삿바늘이 가득한 작은 몸의 아이들이 떠오르는 날이 많다. 특히 11월 말이 되면 몸이 그 슬픔을 기억하는 듯하다.
아픔도 상처도 죄책감도 누르고 눌렀다. 보여주기 싫었고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상담을 공부하고 내담자들을 만나며 알게 된 것은 상처는 보여주고 드러낼 때 아물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10여 년이 지나서야 천천히 다시 덮어둔 내 상처를 보고 보듬어주었다. 몸에 난 깊은 상처도 아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아물어도 흉터는 남기 마련이다. 내 상처도 아직 아물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고, 아마 흉터도 크게 남을 거다.
이 상처와 흉터는 내 아이들이 내게 준 생에 가장 큰 아픔이었다. 하지만 쌍둥이 아이들이 뱃속에서 태동을 하고 태교를 하던 그 시기 또한 내 생에 가장 큰 신비와 행복을 느꼈던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상처와 아픔 덕분에 나는 타인의 아픔을 더 섬세하게 보려고 노력하는 상담자가 되었고, 나를 공부하고 성장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거기까지가 내 쌍둥이들과의 인연이었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니 내게 태동의 기쁨과 행복을 선물해 주었던 나의 아기들에게 감사함과 함께 그리움이 커진다. 15살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또래 아이들을 보면 순간순간 나도 모르게 상상하게 된다. 언젠가 하늘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날에 꼭 안아보고 싶다. 죄책감은 내려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