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설거지통에 그릇을 담가 두는 적이 없었다. 그 바쁜 농사일에 살림을 하면서도 꼭 설거지는 다 해 놓고 나가셨다. 엄마는 설거지를 제때 하지 않는 여자는 '게으른 여자'라 했다. 아니 정확히는 '게으른 년'이라 했다.
결혼 후 홀로 계신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결혼 전 살림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다른 가사에 비해 설거지는 표시가 가장 잘 나는 일이기도 하고, 서서 닦기만 하는 일이기에 나는 가사 중에서 설거지가 가장 할만한 일이라 생각했다. 시어머니께 책잡히지 않는 며느리가 되지 않기 위해 못하는 살림도 열심히 배우려 했다. 무엇보다 설거지를 제때 하지 않는 '게으른 여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밥을 먹고 나면 바로바로 설거지를 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엄마의 말은 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설거지는 바로바로 해서 게을러 보이지 않도록 하라는...어머니는 일을 하시면서도 살림을 함께 하셨고, 워낙 손이 빠르시기 때문에 행여 내가 설거지거리를 싱크대에 두어도 어느샌가 다 하셔서그릇들은 차곡차곡 엎어져 있었다.
10년을 어머니와 함께 살고 분가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홀로 살림을 나시고 우리는 그냥 살던 집에 머물기로 했다. 이상한 일이다. 어머니와 분가를 하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하지 않은 일은 '설거지를 바로 하지 않는 일'이었다. 하루종일 싱크대에 설거지거리를 쌓아두었다. 어머니는 좋은 분이셨고, 어머니가 계셨기에 나는 아이들을 키우며 공부를 하고, 남편과 조율하는 일이 더 수월했고, 때로는 아이들과 살림으로부터 휴식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분가 후 '설거지를 바로 하지 않는 나'를 바라보며 설거지는 내게 보이지 않는 부담감과 책임감이라는 것을 알았다. 주말이나 저녁에는 그냥 설거지를 담가 두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쉬고 싶은 날도 많았다. 그러나 '게으른 여자'가 되고 싶지않았다. '게으른 며느리'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고 싶지 않은 순간에도 설거지는 바로바로 하곤 했었다. 설거지가 아니어도 해야 할 일은 넘쳤고, 공부해야 할 거리는 산더미였고, 나에게 휴식이 필요한 순간도 많았음에도 설거지거리가 싱크대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10여 년 전, 옆 동에 사는 애기 엄마가 식기세척기를 샀다고 했다. 그 친구는 너무 좋다며 내게도 꼭 써보라고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 했다. 마음이 혹 했지만 아무리 각을 짜도 12인용 식기세척기가 들어갈 자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친구는 4 식구고 살림이 많이 않아 6인용으로 충분했지만 손님이 자주 오고, 제사가 많았던 우리 집은 최대한 큰 것을 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크게 소용이 없었다.
갑작스레 이사를 결정했다. 15년 이상이 되어 가전제품들도 수명이 다해가고 있었고, 겸사겸사 가전제품을 다 바꾸기로 했다.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식기세척기는 무조건 사야 한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식기세척기를 먼저 써본 이들이 '신세계네, 설거지 해방이네' 하기도 하고, 애벌세척을 해야 하고 2시간 이상 걸리는 거 그냥 해버리는 게 낫다는 이들도 있었다.
이왕 은행돈으로 집을 사는 거 가전도 얹어보기로 했다. 주방의 구조가 식기세척기를 넣기에 불편한 구조였지만 나는 싱크대 맞은편에다 12인용 식기세척기를 넣었다. 식기세척기는 바로바로 설거지를 하지 않는 나를 '게으른 여자'로 생각하지 않게 만든다. 오히려 하루치 설거지거리를 모아 한꺼번에 돌리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주부'로 생각하게 만들어주었다.
하루치 설거지를 모아 빼곡하게 안에 골고루 잘 채운다. 약간 큰 음식찌거기들은 살짝 헹궈내고 물이 골고루 분사되도록 그릇을 채우는데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이제 문을 닫고 작은 블록의 세제를 넣고, 버튼을 누르면 2시간 후 멜로디가 알려준다. 안에 넣기만 하면 되는데 한 시간이 걸리든, 두 시간이 걸리든 뭔 상관이랴. 성격 급한 엄마는 몇 분이면 후딱 될 것을 식기세척기 같은 것을 샀다고 한마디 하셨으나, 난 이 좋은 걸 이제야 만났다는 게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었다.
식기세척기를 사고 얼마 안 되어 제사가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라 '사랑의 불시착'을 방영하는 날이었다. 이른 제사를 지내고 그릇들을 전부 세척기에 비집어서 넣고 드라마를 보며 왠지 뿌듯해졌다다. 예전같으면 제사후 설거지만 하는데 1시간도 넘게 걸릴 일이었다. 세척기 소리가 티브이 시청을 방해하지도 않았다. 식구들과 함께 과일을 먹으며 티비를 보니 행복하고 편안했다.
식기세척기는 나에게 하루 한 시간 이상 여유를 주었다. 평소 같으면 한시 간 이상 서서 다리 아프고 목 아프고 물 튀기던 시간에 난 책을 보거나 인터넷을 한다. 세탁기가 빨래 해방이 된 것처럼 식기세척기 또한 설거지 해방을 시켜주었다. 난 식기 세척기가 너무 좋다. 때로는 제대로 닦이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그 정도 실수는 아무런 트집이 되지 않는다. 식기세척기는 설거지를 제때제때 하지 않아도 '게으른 여자'가 되지 않게 해 주었고, 나에게 편안하고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