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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베이킹랩 이성규 Mar 28. 2020

밀가루 똥배?

밀은 무죄다

여기 무척이나 도발적인 주장이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신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바로 밀이다. 심장 예방학 의사인 윌리엄 데이비스가  자신의 책 『밀가루 똥배』에 단 부제이다. 중독성, 비만과 셀리악병 유발, 인슐린 저항성 초래, pH 교란, 노화 촉진, 심장병 유발, 뇌세포 파괴, 피부질환 유발.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밀은 만병통치약, 아니 '만병의 근원'이다.


읽는 내내 뭔가 불편했다. 아주 많이. 그리고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저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인류는 왜 밀을 버리지 않고 만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먹었을까? 만병의 근원인데도...


밀 글루텐이 문제인가?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밀가루가 유발했음직한 질병들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났다. 그중 비중이 가장 높은 것이 셀리악병이다. 셀리악병은 밀 글루텐이 유발하는 소화기관 장애로 자기 면역질환의 일종이다. 반면, 글루텐 불내증은 소화기관 장애 없이 발생하는 알레르기, 가려움증, 호흡곤란 등의 증상을 일컫는다.


아하 밀의 글루텐이 문제로군! 그러면 밀 글루텐이 어떻게 셀리악병을 유발하는지가 궁금해졌다. 인체 면역체계의 작동원리를 이용한 설명은 비전공자인 나에게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 같았다. 내 방식대로 풀어본 암호의 내용은 이렇다.


밀의 글루텐은 밀 단백질의 주 성분으로 글리아딘과 글루테닌으로 구성된다. 글리아딘은 사람의 소장에서 아미노산으로 완전분해되지 않고 펩타이드로 남는다.  펩타이드는 소장 세포벽을 통과한 후 CD4+ T 세포와 결합, 면역시스템을 활성화하여 항체를 생성한다. 항체는 소장의 상피를 공격하여 소장의 기능 장애를 가져오고 영양분 흡수능력을 떨어뜨린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의 면역체계가 글리아딘을 병원체로 인식하여 글리아딘을 공격하면서 소장 자체에도 손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글리아딘이 셀리악병의 원인이라면 제빵성 향상을 목표로 육종된 현대밀이 셀리악 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어떻게 봐야 할까? 밀가루의 제빵성은 글리아딘이 아닌 글루테닌에 영향을 받는데...


주장의 근거로 삼은 논문을 찾아보았다. 첫 번째 참고문헌이다. 논문 제목만 봐도 그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은 듯 보인다. 논문의 제목을 우리말로 옮겨 보면 '현대와 토종 6배체 밀 품종에 존재하는 셀리악병 항원 결정: 밀 육종이 셀리악병 발병률을 높이는데 기여했을지도'이다. 내 눈길은 끈 건 '기여했을지도'이다. 육종밀과 육종을 거치지 않은 토종밀 모두에 셀리악병 항원 결정기가 존재한다. 다만 셀리악병 항원 결정기가 발견되는 밀 품종의 수는 현대에 육종 된 밀이 토종밀보다 더 많다. 따라서 밀의 육종이 셀리악병 발병률 증가에 영향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것이 이 논문의 결론이다. 결론을 명확하게 내리는 대신 어느 정도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게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글쓰기 행태임을 고려하면 이 논문의 결론은 '셀리악병 발병률 증가는 밀 육종과는 관련이 없다'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제초제 성분인 글리포세이트가 원인일 수도 있다!

자료 검색 중에 흥미로운 논문을 하나 발견했다. 아래 참고 문헌 중 두 번째 논문이다. 밀에 남아있는 글리포세이트의 성분이 장내 미생물에 교란을 일으켜 자기 면역반응을 일으켰고 그 결과가 바로 셀리악병이라는 게 바로 논문 저자들의 주장이다. 셀리악병 발병률과 밀밭에서 사용된 제초제 글리포세이트 양의 높은 양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그래프는 그들 주장을 완벽하게 뒷받침해준다.


밀가루 가공 방식에도 원인이 있다!

흥미로운 주장은 또 있다. 셀리악병 발병률 증가를 밀가루 가공방식의 변화로 설명하는 것이다. 제분과 제빵 방식의 변화가 그 중심에 있다. 인류가 밀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래로 밀은 맷돌로 제분하였다. 밀가루는 당연히 밀기울이 포함된 통밀가루였다. 하지만 19세기 말 롤러 밀이 도입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새로운 제분 방식은 밀기울이 없는 백밀가루를 만들기에 최적화된 방식이었다. 가게의 매대는 백밀가루로 채워졌다. 밀가루에서 밀기울을 제거함으로써 밀가루에 있는 단백질 성분(셀리악병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글리아딘을 포함한다)을 분해하는 단백질 분해 효소도 같이 제거되었다.


제빵 방식의 변화도 한 가지 원인으로 지적다. 산업화된 대량생산체제 속에서 빵은 더 이상 장시간의 발효를 거치는 발효식품이 아니라 산화제 등 화학첨가제와 기계의 무지막지한 힘을 빌려 한두 시간 내에 찍어내는 패스트푸드가 되었다. 충분한 발효를 거의 거치지 않으니 밀가루의 단백질 성분이 잘 분해되지 않는다. 분해되지 않은 단백질은 그대로 소화기관에 들어간다. 게다가 빵은 단백질 분해 효소가 제거된 백밀가루로 만든다. 설상가상이다.

 

밀과 셀리악병에 대한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 사건 하나가 있었다.

19세기 말, 일본군에 발생한 각기병이 그것이다. 다리가 붓고 힘이 없어 걷기 어려워지는 병이다. 심한 경우 심장기능이 떨어져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징병된 농촌 청년들은 흰쌀밥을 배불리 먹었다. 급식을 든든히 먹었건만 군인들은 어찌 된 일인지 힘을 쓰지 못했다. 군대 전력은 형편없이 떨어졌고 다수의 사망자도 나왔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육군에서 각기병으로 사망한 군인은 20만 명이 넘었다. 신기하게도 급식을 흰쌀밥에서 보리밥으로 바꾸고 채소 반찬을 늘리니 각기병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후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비타민 B1·B2 결핍이 병의 원인으로 밝혀졌다. 더 부드러운 밥을 먹기 위해 벼를 백미로 도정하는 과정에서 비타민을 함유한 쌀눈을 제거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밀가루도 흰쌀밥도 무죄다. 문제는 부드럽고 입에 단 음식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벌려는 탐욕이다.


1. Hetty C. van den Broeck 등, 2010, Presence of celiac disease epitopes in modern and old hexaploid wheat varieties: wheat breeding may have contributed to increased prevalence of celiac disease, Theor Appl Genet, Vol. 121, pp. 1527–1539


2. Anthony Samsel 등, 2013, Glyphosate, pathways to modern diseases II: Celiac sprue and gluten intolerance, Interdiscip Toxical, Vol. 6(4), pp. 159–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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