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더베이킹랩 이성규
Sep 22. 2020
2019년 4월 마지막 날, 빵집을 그만두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지분을 모두 동업자에게 넘기고 나는 빵집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빵집 문을 열고 일 년 반이 지나고 있었다.
빵집을 떠나는 순간, 말 그대로 만감이 교차했다. 후련함, 섭섭함, 상실감, 패배감...
처음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별 기억이 없다. 밀린 잠을 원 없이 잤을 것이고, 자다 지치면 몸을 일으켜 텃밭으로 향했을 것이다. 텃밭을 찾은 내 등에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과 막 찾아온 봄을 맞아 텃밭 가득 자라나는 식물들로부터 새로운 기운을 받았으리라.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한 달을 보내고 난 후 나는 다시 궁리를 시작했다. 그냥 무기력하게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 궁리의 결과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플랜 B, C, 그리고 D.
플랜 B는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가는 거였다. 전 직장 사장님도 만나고 몇 년 만에 손 본 이력서를 알고 지내던 헤드헌터들에게 뿌렸다. 반응은 참담했다. 중소기업에서 오래 근무한 경력이 걸림돌이었다. 어차피 대기업은 언감생심이었고 중견기업이나 중소기업에 자리를 찾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만나는 헤드헌터들마다 어려울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여러 군데 이력서를 넣었지만 면접의 기회조차 잡기 어려웠다. 어렵게 성사된 면접이 두세 개 있었지만 채용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렇게 2019년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고 플랜 B는 내 선택지에서 지워졌다.
플랜 C는 북유럽으로 떠나는 유학이었다. 빵집을 처음 계획하며 생각했던 지속 가능한 발전, 특히 지속 가능한 먹거리 시스템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싶었다. 살기 좋다고 평판이 자자한 북유럽에서 학위를 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박사학위로. 박사과정을 여러 개 지원했지만 되돌아오는 건 We are very sorry로 시작하는 답변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유럽의 교육시스템 하에서 전공 관련 과목을 이수하지 않은 지원자가 상위 과정에 진학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지원했던 박사 자리가 모두 농대에 있던지라 학생을 뽑는 교수 입장에서는 농학 관련 전공과목을 하나도 이수하지 않은 나는 애초에 고려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석사과정을 눈을 돌렸다. 지속 가능한 발전, 지속 가능한 먹거리 시스템이란 주제에 걸맞는 석사과정은 제법 많았다. 스웨덴에 있는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4월 중순 합격자 발표가 났고 나는 지원했던 4개의 프로그램 중 네 번째 순위에 있던 과정에 합격통보를 받았다(스웨덴의 석사 과정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지원시스템을 통해 일괄로 지원하며, 최대 4개까지 지원 가능하다). 6월 말까지 학비를 보내면 스웨덴의 웁살라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눈앞에 생각지도 못한 커다란 변수가 나타났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 집단면역체계를 선택한 스웨덴에선 매일 수백 명의 감염자가 나왔고 알고 지내던 스웨덴의 친구들의 페이스북 피드는 매일매일 비관적인 글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학교에 이메일을 썼다. 입학연기가 가능하냐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연기는 안된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가느냐 포기하느냐 양단간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갈까 말까,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게 시간은 결정을 통보해야 할 시점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텃밭 친구로부터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이 뭐냐고. 스웨덴 유학 가려고 합격통지 받아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 나이에 무슨 유학이냐고, 자기 회사에 출근하라고 했다. 한번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말은 안 했지만 나의 유학 계획에 많이 불안했나 보다.
며칠 후 나는 학교로 입학허가 포기한다는 이메일을 보냈고, 또 며칠 후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
빵집을 그만두고 딱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