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베이킹랩 이성규 Mar 03. 2020

내가 굽고 싶은 빵

어떤 빵을 굽고 싶으세요?


나는 제빵 수업을 이 질문으로 연다. 수업에 오신 분의 수만큼 다양한 답변이 돌아온다. 오신 분들의 배경이 다양하듯 빵에 대한 각자의 생각도 다양하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엔 공통의 키워드가 있다. 우리밀과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건강한 빵이 그것이다. 내가 직접 빵을 구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바로 먹어도 속이 편한 빵을 구워보겠다는 것이었으니 빵을 배우러 오신 분들과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공명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가끔은 나도 같은 질문을 받는다. 어떤 빵이 좋은 빵이냐고. 자주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다 보니 좋은 빵에 대한 나의 생각도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로컬푸드, 좋은 빵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기준이다. 나는 빵도 로컬의 재료로 만드는 로컬푸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빵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밀가루는 당연히 우리 땅에서 자란 우리밀을 써야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이것이 내가 우리밀에 그토록 천착하는 이유이다. 환경친화적인 재배법으로 기른 우리밀이면 더할 나위가 없다.


밀 특유의 향과 풍미가 살아있는 빵, 나의 두 번째 기준이다. 우리는 밥을 주식으로 한다. 따라서 빵은 주식이 아닌 간식거리이다. 간식거리는 당연히 달달하고 먹기 좋게 부드러워야 한다. 그러다 보니 설탕, 유지, 충전물 등이 많이 들어간 빵이 인기다. 이런 빵에서 밀의 향이니 풍미니 하는 것은 사치이다. 밀가루는 그저 충전물을 담을 수 있는 빵의 구조를 만들어 주는 역할만 하면 그만이다. 대량으로 수입되는 밀로 만든 저렴한 밀가루로도 충분하다.


각각의 밀 품종은 자기만의 향과 풍미를 지니고 있다. 수확량 증대와 제빵성 향상이라는 목표로 진행된 현대 밀 육종 이전의 밀 품종은 특히 더 그렇다. 토종밀, 고대밀이 바로 그런 밀이다. 내가 토종밀, 고대밀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이다. 나는 각각의 밀 품종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향과 풍미를 담은 빵을 굽고 싶었다.


빵은 원래 슬로푸드다. 베이커가 직접 배양한 효모와 유산균들이 살아있는 사워도 스타터를 반죽에 첨가해 장시간 천천히 발효해서 굽던 음식이었다. 이런 빵은 효모와 유산균들이 밀가루에 있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질 등을 충분히 분해해 먹으면 소화흡수가 잘 된다. 물론 속도 편하다. 또한 발효과정에서 생성된 에스테르 등 각종 풍미 성분이 내는 풍부한 발효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대량생산 방식의 도입과 함께 빵은 완전 자동화된 생산라인에서 2, 3시간이면 완성되는 '패스트푸드'가 되었다. 과도한 기계 사용에 대한 대응과 발효촉진을 위해 사용하는 많은 식품첨가제로 인해 속이 더부룩한 빵이 만들어져고, 발효 풍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빵이 되었다. 나는 패스트푸드가 아닌 슬로푸드를 굽고 싶다. 


맛있는 빵. 먹는 즐거움이 없는 인생은 무미건조하다. 음식은 단지 인체의 신진대사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빵도 마찬가지다. 건강에 좋은 빵만으로는 부족하다. 건강에 좋으면서 맛도 있어야 한다. 그럼 빵의 맛은 어디에서 올까? 빵 맛의 근원은 크게 네 가지다. 밀 고유의 맛과 향, 발효과정에서 나오는 풍미 성분, 마이야르 반응에서 발생하는 풍미 성분, 그리고 견과류, 과일, 치즈 등 충전물이 그것이다. 밀과 발효과정에서 나오는 맛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마이야르 반응은 오븐의 고온 환경에서 밀가루의 당분과 단백질이 변성해 표면이 갈색으로 변하는 반응이다. 이때 수백 종의 새로운 풍미 성분이 만들어진다. 특히 구수한 곡물의 향이 배가된다. 철판에 볶는 요리를 먹은 후 먹는 볶음밥을 좋아한다. 철판에 얇게 편 밥에 숟가락을 들이밀기 전에 뜨거운 철판의 열에 타닥타닥 소리가 나기 시작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이 순간이 바로 철판 비빔밥이 철판 볶음밥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철판 볶음밥 맛은 철판 비빔밥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마이야르 반응이 이 질적 변화의 본질이다. 빵도 마찬가지다. 오븐의 열기를 받아 하얗던 빵 표면이 짙은 색으로 변하는 건 철판 비빔밥에서 철판 볶음밥으로 바뀌는 질적 변화와 동일하다. 내가 이건 좀 많이 탄 거 아냐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짙은 색으로 빵을 굽는 이유이다.

사실 빵 맛을 가장 쉽게 낼 수 있는 건 이런저런 충전물을 넣는 것이다. 달거나 고소하거나 감칠맛을 내는 충전물을 넣으면 맛있는 빵을 구울 수 있다. 이런 빵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도 좋다. 하지만 충전물의 강한 맛은 밀의 풍미도, 발효 풍미도, 마이야르 반응으로 새로 만들어진 풍미 성분의 풍미도 가리기 마련이다.


좋은 빵의 마지막 조건은 빵의 특징을 제대로 살리는 것이다. 바게트는 바게트대로, 깡빠뉴는 깡빠뉴대로, 치아바타는 치아바타대로 그 빵만의 특징이 있다. 빵 고유의 특징은 그 빵의 유래, 발전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게트를 예로 들어 보자. 바게트 유래에 대한 여러 설 가운데 1830년대 후반 오스트리아 출신 아우구스트 장이 프랑스에 도입한 빵 비에누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빵 비에누아의 인기에 힘입어 길이가 긴 빵이 만들어졌으며 나중에 이를 바게트라 부르게 되었다. 긴 빵 모양과 함께 아우구스트 장에 의해 프랑스에 소개된 오븐 내 스팀 주입, 제빵용 이스트의 사용 또한 바게트의 발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모양, 스팀, 제빵용 이스트가 바게트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이들 세 요소들이 잘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제대로 된 바게트가 나온다.


비앙 퀴(bien cuit).
잘 구워졌다는 프랑스 말로 제대로 잘 구워낸 바게트를 묘사할 때 쓰는 표현이다. 바게트 묘사에 쓰일 때 비앙 퀴에는 바삭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바게트의 바삭함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특성이 있다. 바로 crumb to crust ratio, 즉 속살과 표면의 비율이다. 이 비율이 낮을수록, 즉 표면이 속살보다 많은수록 빵은 더 바삭해진다. 바게트는 길이를 늘임으로써 이 비율을 극단적으로 낮추었다. 바게트가 다른 빵에 비해 훨씬 더 바삭한 이유이다.


스팀 또한 바게트를 굽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스팀 없이 제대로 된 바게트를 구울 수 없다. 스팀은 바게트 표면을 더욱 바삭하게 하고, 마이야르 반응을 촉진시켜 바게트의 풍미를 높이며, 오븐 스프링을 촉진하여 폭신한 속살을 만들어 준다.


바게트의 마지막 요소는 제빵용 이스트이다. 바게트는 1880년대 상용화된 제빵용 이스트를 사용해 발효시킨 최초의 린 브레드*이다. 바게트는 속살이 폭신한 빵이다. 밀기울이 들어가지 않은 하얀 밀가루를 제빵용 이스트로 발효시켜 속살이 폭신한 바게트를 구웠다. 당시 파리에서 바게트의 선풍적인 인기는 제빵용 이스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통밀 바게트나 사워도우로 발효한 바게트도 있지만 바게트는 백밀가루를 제빵용 이스트로 구운 빵이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면 어김없이 날아오는 질문이 있다.


"그럼 당신의 빵은 어디까지 왔습니까?"


"글쎄요, 한 60% 정도요?"


*린 브레드(lean bread): 우유, 계란, 버터 등 유지가 들어가지 않은 빵. 유지가 들어간 빵은 리치 브레드(rich bread)라고 한다.

이전 18화 자네만의 빵을 만들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