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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베이킹랩 이성규 Mar 26. 2020

자네만의 빵을 만들게

니헤이 도시오 선생의 가르침

니헤이 도시오 선생은 빵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프랑스 빵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선생은 일본의 빵신(神)이라 불린다. 2017년 7월, 선생과 함께 할 기회가 생겼다. 선생이 쓰신 책의 한국어 판(『Bon Pain 좋은 빵으로의 길』) 출판기념행사로 빵 시연회가 열린 것이다. 운 좋게도 나는 시연회 동안 보조 역할을 맡게 되었다.


선생은 예정된 시연회 날짜보다 일주일 일찍 서울로 오셨다. 첫인상은 강력했다. 깡마른 체격에 날카로운 얼굴. 한눈에 봐도 보통 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많이 만날 수밖에 없는 업에 오랫동안 종사하다 보니 사람을 보는 나름의 눈이 생겼다. 그 나름의 눈에 따르면 선생은 꼬장꼬장한 장인이었다.


선생은 왼팔에 석고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다 사고가 났다고 한다. 빵을 굽기 위해선 두 손이 필요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시연회를 미룰 법도 하건만 선생은 예정대로 시연회를 진행하고자 하셨다.  '선생님, 왼팔 불편하신데 빵 구우실 수 있겠어요?'라는 질문에 문제없다. 옆에서  도와달라는 부탁과 함께.


금요일로 예정되어 있던 시연회 준비는 월요일에 시작되었다. 한국어판을 번역하신 곽지원 선생이 통역과 진행을 맡았고, 나를 포함한 3명이 보조를 맡았다. 준비 첫날은 시연할 빵에 대한 소개로 시작되었다. 선생은 책에 실린 모든 빵을 시연하실 계획이었다. 빵 하나하나에 대한 선생의 강의가 이어졌다. 유래, 레이몽 깔벨교수와의 인연, 빵 발효의 원리 등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강의는 불쑥불쑥 던지는 나의 질문으로 끓어지기 일쑤였지만, 선생은 모든 질문에 친절한 답을 주셨다.


강의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혼자 빵을 구우며, 빵 수업을 받으며 갖게 된 수많은 의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을 수 있었다. 평생의 연구와 실습을 통해 체화한 지식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시는 모습은 감동이었다. 빵신이라는 호칭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선생이 챙겨 오신 것 중에 내겐 아주 특별한 것이 있었다. 바로 일본 Nissin제분사의 밀가루 팸플릿이다. 팸플릿에는 밀가루 제품의 회분율, 단백질 함량, 용도와 특징이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팸플릿에 소개된 밀가루 제품 수는 놀라웠다. 19종! 그것도 빵용 밀가루만! 빵에 따라 그 빵에 맞는 밀가루가 있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틀째 되는 날은 나 혼자 선생을 도왔다. 하루 종일 선생과 온전히 함께 할 수 있는 둘도 없이 좋은 기회였고 제빵에 대한 많은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내 일본어 실력으론 원활한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얼마나 아쉬웠던지. 그 날 페이스북에 이런 소회를 남겼다.


대가와의 하루,
하고 싶은 말 못 하고
잘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대가의 손동작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루였습니다.  
세상엔 참 대단한 빵도
대단한 분도 많습니다.
더 겸손해져야겠습니다


이틀 간의 사전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시연회 당일. 이틀간 예행연습을 했지만, 몇 시간 만에 5가지 빵을 구워야 하니 옆에서 보조하는 우리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선생이 굽는 빵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탓에 시연회가 시작되니 갈팡질팡 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실수가 반복되자 선생의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원래 일에 대한 기준이 높은 분이니 그 기준에 맞추어 주지 못하는 미숙한 보조들이 맘에 안 드셨던 거다.


좀 적어라 적어!

동시에 여러 가지 빵을 구울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일정관리이다. 빵은 종류에 관계없이 비슷한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공정이 겹치는 일이 다반사다. 설비 용량이 충분하면 문제가 없지만 비용 문제로 설비를 충분히 갖추는 건 한계가 있다. 하여 공정이 최대한 겹치지 않도록 작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필요한 건 계획과 기록이다. 계획이야 시연자인 선생이 하시는 거고 보조로서 나의 역할은 공정의 진행 현황을 적시에 선생께 알려드리는 일이었다. "좀 적어라 적어!" 이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나에게 선생이 버럭 하며 하신 말씀이다. 그래 머리가 안되면 적었어야 했는데, 그때의 무안함이란. 그때의 기록이 A2 크기의 종이에 남아 있다. 한 면엔 내가 쓴 빵의 공정과 시간과 공정의 묘사가, 다른 한 면엔 선생이 쓰신 시연회 전체 계획과 빵 발효에 대한 설명이 남아 있다. 한 순간의 무안함과 바꾼 소중한 자산이다.   


보조의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멋진 빵을 구워내셨다. 모양도 맛도 향도 기가 막혔다. 특히 이스트로 발효시켜 구운 뤼스틱(Pain Rustique)은 감동이었다. 짙은 황금색으로 구워진 빵은 먹음직스러웠다. 빵이 다 식자 선생은 하나를 들고 코를 박으셨다. 그리고 빵을 꾹꾹 누르며 냄새를 맡으셨다. 빵 향은 이렇게 맡는 거야라며. 이어서 빵을 써셨다. 빵칼의 움직임에 따라 경쾌하게 울리는 바삭거림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선생에게 한조각을 넘겨받  한 입 베어 물었다. 머릿속에서 댕, 댕, 종이 울렸다.  곡물의 구수함과 함께 상큼한 과일향이 났다. 이스트로 발효 빵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뤼스틱은 빵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첫 빵을 구운 후 이때까지 나는 사워도우 빵만이 진정한 빵이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트로 굽는 빵은 들여다볼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뤼스틱을 맛보고는 이스트 발효로도 훌륭한 빵을 구울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자네만의 빵을 굽게나

시연회에서 선생은 이스트 발효 빵, 르방 빵, 이스트와 르방 같이 쓴 하이브리드 빵을 선보이셨다. 이스트 발효빵은 이스트 발효빵대로, 르방 빵은 르방 빵대로, 하이브리드 빵은 하이브리드 빵대로 각자 매력을 발산하였다. 선생은 시연회를 통해 어떤 발효법이 다른 발효법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특성을 가진 빵을 구워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건 아닐까?


햇병아리 베이커인 나에게 선생은 귀중한 조언을 남기셨다.

 

어떤 빵이든 그에 어울리는 발효법이 있다네. 빵에 따라 이스트로 발효할 수도, 르방으로 발효할 수도 있지. 둘을 섞어 이스트와 르방의 마리아쥬(marriage)를 만들어 보게나. 자네만의 멋진 빵을 만들 수 있을 거야. 행운을 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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