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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베이킹랩 이성규 Aug 07. 2020

한 번만 만나줘요 세르게이

세르게이에게 만나자는 이메일을 두 번 보냈다. 러시아로 출발하기 전에 하나,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모스크바로 출발하기 전에 하나. 모스크바에 도착하고 나서도 그에게선 답장이 오지 않았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졌다. 조급해졌다. 이메일을 또 보낼까 하다 그만두었다. 너무 보채는 것 같아서. 


모스크바에 도착한 삼일째 아침 휴대폰에 이메일 알림 메시지가 떴다. 급히 열어보니 세르게이의 답장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넌 어떤 놈인데 나한테 빵을 가르쳐 달라는 거야?'라는 내용이었다. 글쎄, 난 어떤 놈이지? 그래 난 한국에서 빵 굽는 놈이지. 그동안 내가 구웠던 빵 사진 몇 장과 내 페이스북 주소 링크를 답장으로 보내주었다. 지금 모스크바에 와 있고, 내일 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도 썼다.  바로 그의 답장이 왔다.


한번 보자. 여기로 와라. 지금 당장


그가 보내 준 주소를 구글 지도에서 검색해보니 Prof. Puf라는 곳이었다. 얼른 가방을 챙겨 메고 숙소를 나섰다.


세르게이는 제빵 분야 파워블로거이다. 수만명이 그의 블로그를 팔로우하고 있고 포스팅 하나에 달리는 댓글수도 엄청나다. 그의 블로그는 빵 특히 호밀빵에 대한 고급 정보로 가득하다. 그런 그를 만나 같이 빵을 구울 수 있다는 기대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가 보내온 주소지에 있는 Prof. Puf에 도착하였다. Prof. Puf는 그가 동업자와 함께 운영하는 베이커리 카페이다. 그가 구운 빵을 곁들인 요리를 먹을 수 있다. 때마침 점심식사 시간이어서 간단한 점심 식사를 대접받았다. 얇고 바삭한 메밀 빵 위에 채소와 생선 또는 육류를 올린 음식이었다.  음식은 맛있어 보였다. 하지만 어떤 맛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난 음식보다는 그와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있어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와 마주 앉은 나에게는 질문 리스트가 있었다. 그를 만나면 물어볼 것들이 공책  가득 적혀 있었다. 질문 하나하나에 대한 그의 답을 적어나갔다. 듣는 동안 또 다른 의문이 생기기도 하여, 질의응답 시간은 길어져만 갔다.


자 이제 이 정도 하고 빵을 구우러 가자는 그를 따라 빵공장으로 갔다. 그의 빵 공장은 베이커리 카페에서 멀리 떨어진 모스크바 교외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얀 가운과 위생모자를 쓰고 들어간 그의 빵 공장은 기대했던 것보다 아담했다. 빵 공장에서는 베이커 3명이 느긋하게 빵을 굽고 있었다. 


그가 함께 굽자고 한 빵은 보로딘스키와 메밀 사워도우 빵이다. 보로딘스키는 내가 이 양반께 꼭 배워보고 싶다고 한 빵이다. 이 빵을 만드는 방법에 아주 독특한 부분이 있다. 바로 당화 공정이다. 맥주 만들 때 몰트를 높은 온도에서 끓여 당분을 뽑아내는 공정, 바로 그것이다. 보로딘스키의 단맛과 짙은 색의 비결이 바로 이 당화다. 세르게이는 당화를 위해 자신만의 자동 설비를 제작하였다. 설비의 핵심은 당화에 최적인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호밀가루와 물을 넣고 설비를 가동하면 설비 저쪽 끝에서 단내 폴폴 나는 진한 갈색 액체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액체는 마치 템퍼링이 잘 된 초콜릿 같았다. 아직 따끈따끈한 액체에 푹 넣은 새끼손가락에 묻은 액체를 할짝할짝 맛본다. 달콤하다. 호밀 특유의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화 이후의 과정은 일반적인 빵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당화된 액체에 호밀가루, 물, 소금, 호밀 사워도우를 넣고 반죽하고, 발효하고, 분할, 성형해서 다시 발효하고 굽고, 식기를 기다렸다가 잘라서 먹고. 아 잘라먹는 건 며칠 미루기로 했다. 2, 3일 후 잘라서 먹으라는 세르게이 선생의 말을 따라서.


선생은 자신이 쓰고 있는 호밀 사워도우 스타터도 나누어 주셨다. 불가리아 시골마을에서 호밀빵을 구우시는 스테파니다 할매에게서 얻어오셨다고 한다. 보여주신 스테파니다 할매 호밀빵 굽는 동영상에서 선생과 할매가 주고받는 말속에 재밌는 것들이 많을 것 같았다. 러시아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선생과 보낸 하루는 러시아 여행의 백미였다. 대가와 함께 빵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다니, 내가 베이커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날의 감흥이 페이스북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대가를 만나러 간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제빵 이론가이자 베이커인 그를 만나러 간다. 번역기 돌려가며 읽어온 러시아어로 쓰인 그의 블로그는 제빵 지식의 寶庫였다. 러시아로 떠나기 한참 전 그에게 만나자고 연락했는데 모스크바에 도착해서야 회신을 받았다. 이번 러시아 연수의 백미가 될 것이다. 
주옥같았던 어제의 순간들. 아낌없이 보여주고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 애쓰는 그의 모습에서 여러 분들을 떠올린다. 자신이 가진 것을 한치의 주저함 없이 나누는 것은 대가의 풍모이자 자신감인 듯하다.


선생과 함께 구운 빵은 종이봉투에 잘 넣어 서울로 가져왔다. 첫날은 낮과 밤으로 잠을 자고 다음날 빵을 잘랐다. 구운 지 3일째, 빵은 부드러워졌고 향은 더 강해졌다. 집안 가득 퍼지는 빵의 향기에 방구석에서 단잠을 자고 있던 애완견 친친이도 달려 나왔다. 옛다 한 입 하라며 한 조각을 던져주니 야물 야물 맛있게 먹는다. 나도 아내도 딸내미도 오물오물 맛있게 먹었다.


선생은 지금도 왕성하게 빵을 구우시고, 베이킹 클래스도 여신다. 최근에서 모스크바 여러 곳에 빵집 분점을 내느라 분주하시다. 난 페이스북을 통해 가끔 안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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