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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베이킹랩 이성규 Sep 14. 2020

마르쉐 햇밀장

마르쉐는 서울의, 아니 한국의 대표적인 농부장터이다. 농부장터는 농부들이 직접 재배한 농작물을 직접 판매하는 직거래 시장이다. 마르쉐가 농부장터이지만 농부장터와 다른 점은 농부들의 농산물을 이용하여 음식을 만드는 조리팀과 수공예 팀도 같이 참여한다는 점이다.

2017년  마르쉐를 처음 접했다. 명동성당 지하 상업공간에서 열린 마르쉐, 재즈밴드가 연주하는 신나는 재즈를 배경으로 판매자와 소비자들의 유쾌한 인사와 흥정이 오가는 아주 정겨운 광경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런 장에 한 번 나가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로부터 일 년 후 나는 마르쉐에 셀러로 참가할 수 있었다.  황진웅 선생이 토종 곡식 공유 농업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아쥬드블레를 초대해 주신 게 그 계기다. 황진웅 선생은 빵집에 앉은뱅이 밀가루와 캐나다 토종밀인 Red Fife를 대주시는 농부시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이른 봄의 첫 참가, 추위에 떨며 빵을 팔던 기억이, 다 팔리지 않은 빵을 챙겨 오며 느꼈던 씁쓸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쥬드블레는 7월 햇밀장을 기점으로 파일럿팀으로 마르쉐에 정기적으로 초청을 받았고 2018년 마지막 장에서 정식 팀이 되었다. 아쥬드블레가 마르쉐의 정식팀이 된 데는 동업자의 노력 덕이다. 사실 난 마르쉐 참가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마르쉐 운영팀에서 참가 요청 메일이 와도 동업자에게 '형 맘대로 하세요'라며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남은 빵을 들고 돌아오며 들었던 첫 참가의 좌절감이 작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르쉐에 참가하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마르쉐가 점점 더 재밌어졌다. 장사가 점점 잘 되었다는 말이다. 장마다 빵을 사러 오시는 고정 고객이 늘어갔고, 가끔은 판매대 앞에 줄도 생기기도 했다. 장이 끝나기 한참 전에 준비해 간 빵이 모두 매진되 즐거운 경험도 했다. 마르쉐에선 우리가 굽는 우리밀 빵에 대한 반향을 느낄 수 있어 가슴이 설레었다. 양평동 골목 한 귀퉁이에 자리한 조그만 빵집에서 매일같이 느끼던 고독감, 메아리 없는 외침을 하고 있는 듯한 공허함과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우리가 추구하던 우리밀과 건강한 빵에 대한 가치를 인정해 주는 고객을 만난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햇밀장이 열리는 7월의 마르쉐는 좀 더 특별하다. 햇밀장에선 밀과 빵이 장의 주인공이다. 햇밀장엔 우리밀 빵을 굽는 전국의 베이커들이 맞댄 매대 위에서 자신의 빵과 사연을 맘껏 이야기한다.


2018년 처음 마르쉐 햇밀장에 참가하며 장문의 소개글을 썼다.  




토종밀의 맛과 풍미가 뛰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건강한 빵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빵을 굽기 시작한 후 자연스럽게 빵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시중에서 팔리는 밀가루는 수확량 증대만을 위해 육종 된 현대 밀을 제분하여 만든 것으로 현대 밀은 밀 특유의 맛을 잃었고 그 밀로 만든 빵도 맛과 풍미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수입밀뿐만 아니라 우리밀도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에 반해 토종밀과 고대밀은 밀 품종 고유의 맛과 풍미가 뛰어나다는 것을 앉은뱅이밀로 작업하며 깨달았습니다. 토종밀에 대한 관심은 앉은뱅이밀을 넘어 외국의 토종밀과 고대밀로 확대되었습니다. 지금은 앉은뱅이밀뿐만 아니라 Red Fife, Turkey Red, Rouge de Bordeaux, Banatka 등 외국의 토종밀 품종과 Khorasan, Emmer 등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재배해온 고대밀 종자를 수집하여 직접 기르고 있습니다.


토종 농부 황진웅 선생이 공주에서 자연재배로 기른 앉은뱅이밀을 주로 사용합니다. 빵에 따라 프랑스 밀과 터키산 유기농밀을 블렌딩 하여 사용합니다. 앉은뱅이밀은 유럽식 식사빵에 많이 사용하는 프랑스 밀에 비해 수분을 많이 흡수하여 수분율이 높은 빵을 만들 수 있고 풍미도 더 진합니다. 다만 글루텐의 질이 프랑스 밀에 떨어져 빵의 볼륨과 외양은 프랑스 밀로 만든 빵보다 못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글루텐의 질과 양에 대해서는 아직 국내에 시험자료가 없기 때문에 올해 자료를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 땅에서 자라는 우리밀이라는 당위성이 아닌 맛과 풍미가 좋고 제빵성도 따라주는 밀과 빵으로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로컬푸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긴 하지만 맛이나 다른 소구점이 없는 로컬푸드는 소비자의 관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여러 지역의 밀로 빵을 만들어 본 결과 같은 품종의 밀일지라도 재배지역에 따라 특성이 달라짐을 느꼈습니다. 따라서 지역의 환경에 맞는 밀 품종을 재배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햇밀은 신선함, 고마움, 새로운 도전입니다.
햇밀은 신선함입니다. 농작물은 잘 익은 것을 갓 수확했을 때가 가장 신선하고 맛있습니다. 밀도 마찬가지입니다. 햇밀은 고마움입니다. 10월 파종한 밀은 발아해서 손가락 길이 정도로 자란 후 동면에 들어갑니다. 봄이 되어 기온이 올라가면 맹렬한 기세로 자라 5월 꽃이 피고 수정되어 6월 수확에 이릅니다. 밀을 파종한 작년 늦가을은 가을 가뭄이 유독 심했습니다. 그래서 땅 속에 들어간 알곡들의 발아율이 현저히 낮았습니다. 겨울 추위도 심해서 그나마 발아한 싹들도 많이 얼어 죽었습니다. 수확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다행히 초봄에 비가 많이 내려 살아남은 싹들이 잘 자라주었고 수확량도 우려와 달리 평년 수준은 되었습니다. 가을 가뭄과 강추위를 이겨내고 열매를 맺어준 밀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햇밀은 새로운 도전입니다. 베이커들에게 밀가루를 바꾸는 건 크나큰 도전입니다. 밀가루의 특성에 따라 수분율, 반죽 정도 등 제빵 공정과 조건을 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조정은 짧게는 2, 3일 길게는 일주일 이상의 테스트 베이킹을 필요로 합니다. 이 작업은 정상적인 빵 만들기와 병행해서 해야 하기 때문에 일선에 있는 베이커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밀도 생명이다 보니 매년 기후에 따라 그 특성이 달라집니다. 대형 제분업자들은 그 특성의 변화를 다양한 첨가제와 블렌딩을 통해 조정하여 품질을 일정하게 할 수 있지만 우리밀을 제분하는 소규모 제분업자들은 그럴만한 능력도 데이터도 없습니다. 따라서 올해 햇밀로 만든 밀가루는 작년 것과 어떻게 다를지 알 수 없고 다만 테스트 베이킹을 통해 그 특성을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햇밀은 베이커에게 새로운 도전입니다.

잘 발효된 반죽의 향을 맡을 때, 잘 구워진 빵에서 버터향이 스며 나올 때 가장 행복합니다.
뤼스틱이라는 프랑스 빵이 아쥬드블레의 시그니처 빵입니다. 프랑스 빵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일본의 빵 신 니헤이 도시오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은 빵입니다. 이 빵은 밀가루, 물, 소금, 극소량의 이스트만으로 만드는 빵입니다. 빵을 굽기 시작하면서 이스트로 만드는 빵은 맛이 없다, 건강한 빵이 아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빵 맛은 그런 생각을 일거에 날려 주었습니다. 이스트로 만든 빵도 훌륭한 풍미를 내는 멋진 빵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 빵입니다. 이스트로 만든 빵과 사워도우 빵은 각각 다른 특성과 매력을 지닌 빵이며 이 둘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자신만의 빵을 만들어 보라는 니헤이 도시오 선생의 한마디는 앞으로 쭉 화두로 삼고 살아갈 겁니다. 뤼스틱은 토종 농부 황진웅 선생의 앉은뱅이밀로 만들고 있습니다.

밀가루, 물, 소금, 천연효모(또는 소량의 이스트)로 만드는 유럽식 식사빵은 담백합니다. 하지만 입안에서 오물거리며 오래 씹어보면 밀 향, 저온에서 긴 시간 동안 진행한 발효로 생성된 맛, 진하게 색을 낸 크러스트에서 일어난 밀리야드 반응에 의한 향미 성분이 내는 맛 등 복합적인 맛들이 미각을 자극합니다. 앉은뱅이밀로 만든 빵은 빵을 다 삼킨 후 혀 뒤쪽으로부터 구수하고 진한 밀 향이 밀려 올려와 입안 가득 찹니다. 사워도우 빵은 좋은 버터와 꿀을 올려 드셔도 좋습니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드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당일 다 드시지 못한 빵은 지퍼백이나 밀폐용기에 넣어 냉동 보관하셨다가 드시기 한두 시간 전에 실온에서 자연해동해서 드시면 됩니다. 미니 오븐 또는 토스터나 뜨겁게 달군 팬에 앞 뒷면을 살짝 구워 드시면 더 맛있습니다. 팬에 구울 때 취향에 따라 올리브 오일이나 버터를 둘러서 구워 드셔도 됩니다. 소비자들 또한 설탕, 버터, 각종 충전물이 내는 맛이 아닌 담백한 밀 향에 좀 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앉은뱅이밀로 바게트, 뤼스틱, 사워도우 빵 등 린 브레드를 굽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식빵, 단과자빵, 패이스트리, 브리오슈 등 버터나 설탕이 많이 들어간 리치 브레드를 굽는데 도전하고 있습니다. 식빵은 이미 방법을 찾았고 다른 리치 브레드들도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좋은 재료를 써서 재료, 특히 밀의 향을 유지하면서 장기 발효로 발효향을 극대화하는 것, 폭신하면서도 크러스트가 바삭하게 구워내는 것에 항상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온에서 장시간 발효한 반죽이 담긴 통을 열어 코를 박고 발효향을 맡을 때, 반죽이 오븐에 들어가 빵으로 구워지면서 내는 버터향이 오븐 밖으로 스며 나올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아쥬드블레를 그만둔 후에도 햇밀장에 참가할 수 있었다. 아쥬드블레가 아닌 더베이킹랩의 이름으로. 우리밀에 대한 나의 노력을 인정해 주시는 이보은 대표의 초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속이 아쥬드블레에서 더베이킹랩으로 바뀐 만큼 햇밀장에 참가하는 목적도 달랐다. 빵집 베이커로 참가하는 햇밀장은 일 년 동안 구워온 우리밀 빵을 뽐내는 자리였다. 하지만 더베이킹랩 대표로서 나는 햇밀장에서 우리밀의 한계와 가능성  그리고 발전방향에 대한 한층 깊은 논의에 불을 지피고 싶었다. 2019년엔 다양한 토종밀과 고대밀로 구운 빵 테이스팅과 함께 빵톡을 진행했다. 빵톡은 밀과 빵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더베이킹랩의 인문학 강좌이다. 소규모로 진행된 빵톡에선 참가자들은 토종밀과 고대밀을 직접 만져보고 맛보았다. 그 밀로 만든 빵을 맛보는 시간도 가졌다. 비록 몇 명 되진 않지만 빵에 밀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주는지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기를 바랐다.


마르쉐 햇밀장은 매년 진화한다. 6회째를 맞는 2020년은 햇밀장의 진화하는 모습이 더 두드러진 한 해였다. 비록 코로나의 확산으로 한번 연기되고 행사 진행의 제한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우여곡절 속에도 마르쉐 운영팀의  우리밀에 대한 열정과 햇밀장에 쏟아부은 노력은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 햇밀장에 참가한 셀러의 범주는 농부와 베이커에서 제분소로까지 확장되었다. 햇밀장 브로셔는 작년보다 더 두꺼워지고 내용은 더 충실해졌다. 갖가지 밀 품종이 전시된 전시대는 예술작품 같았다.


올해 햇밀장의 백미는 단연 '햇밀 대화 모임'이었다. 우리밀의 이해관계자들이 모두 모여 우리밀의 현황과 미래를 논의하는 장이다. 나는 '우리밀의 가능성과 발전방향'이라는 주제로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나누었다. 우리나라 밀 연구를 책임지고 있는 국립 식량과학원의 밀연구팀 팀장까지도 참여할 정도로 햇밀장의 위상이 높아졌다.


짧지 않은 시간의 햇밀 대화 모임은 이해 관계자들 간의 견해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장이었다. 농부는 농부대로, 제분소는 제분소대로, 베이커는 베이커대로, 농정 담당자는 농정 담당자대로, 나는 나대로의 입장과 견해를 밝혔다. 비록 모임 마지막에 토론 시간을 두었지만 활발한 의견 교환이나 토의로 이어지진 못했다. 딱 이만큼었다. 아직까지는 누구도 이렇게 해봅시다라는 실질적인 안을 낼 수 있는 조건에 이르지 못 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욱한 안개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우리밀이라는 길,

안개를 헤치고 한 발씩 앞으로 내딛는 마르쉐 햇밀장의 우직한 걸음걸음을 응원한다.



사진제공:  마르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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