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9세)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아들은 책 한 권을 가지고 왔다. 무슨 책이냐고 물으니, 반 친구들이 한 해 동안 적은 모음집이라고 했다.
궁금한 마음에 볼 수 있냐고 했더니 자신의 글도 있어 보여주기 싫다고 했다. 쿨한 아빠는 궁금하지 않다며, 더 이상 보여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들은 나와 다른 성격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아들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들이 만들어내는 상상의 세계가 궁금해졌다. 수많은 졸라맨의 세계도 신기해졌고, 매일 중얼거리는 또 다른 세계도 궁금해졌다.
그리고 아들이 보여주기를 거절 한 그날.
아들이 잠든 밤, 쿨한 아빠는 글 모음집을 펼쳐보았다.
"무인도에 조난당했다. 딱 세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면 왜, 무엇을 가져가고 싶나요?"
상상력을 자극하는 물음에 아이들은 다양한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깔끔한 구성과 형식.
몇몇 아이들의 글에서는 분명 논술 학원의 영향이라 느껴지는 부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 아이들의 답에는 가족이 적혀있었다.
아들만 제외하고.
저는 세상에서 제일 거대한 호박과 빨간색 깃발, 그리고 물을 가져갈 것입니다.
호박은 배가 되기도 하고 식량이 되기도 합니다. 호박의 윗부분을 뚫어 안에 들어가서 앞쪽에 작은 구멍 몇 개를 뚫을 겁니다. 그러면 앞이 보일 겁니다.
배가 고프면 호박을 조금씩 먹을 수 있습니다.
빨간색 깃발을 꽂아 구조신호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물을 안 먹으면 탈진이 생겨서 병에 걸릴 수도 있기 때문에 물을 가져갈 겁니다.
비가 올 때는 호박 위쪽을 뚫어서 생긴 뚜껑을 덮어 비를 피할 수 있습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는 호박도 잘 보일 것이고, 빨간색 깃발은 더욱 잘 보일 겁니다. 아주 아껴서 먹는다면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바다 한가운데에 왔다면 깃발을 잠시 빼서 노를 저을 수도 있습니다. 상어가 온다면 깃발로 때리거나 물통으로 때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땅에 다다르면 돌 몇 개와 나뭇가지, 튼튼한 줄기와 짐승의 가죽을 찾을 것입니다. 가죽으로는 외투를 만들 수 있고, 나뭇가지에 줄기를 엮어 낚싯대를 만들어서 미끼를 달아 생선을 먹을 수 있습니다.
돌을 서로 부딪치게 해서 불을 피울 수도 있습니다. 깃발이 너무 낡아서 찢어지면 동물의 가죽을 걸어서 구조 신호를 보낼 겁니다.
만약 물이 다 떨어졌다면 나뭇가지로 구멍이 뚫린 그릇을 만들어서 물을 남기고 소금을 빼서 마실 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떠내려온 조개나 가재, 게도 구워 먹을 수 있습니다. 게는 먹고 소라에 호박을 넣어서 미끼를 만들 수 있습니다.
무인도에 갈 때 세상에서 가장 큰 호박을 가지고 가겠다는 아들의 상상력을 난 도무지 따라가지 못한다. 상어를 만나면 깃발과 물통으로 때린다는 무모함도 결코 따라 하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무인도에서도 외롭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같이 갈 사람은 한 명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서 알았는지 구체적으로 적은 것을 보면, 어디에 가져다 놓아도 살아갈 수 있을 듯하다. 그것만으로 만족한다.
세상에서 제일 큰 호박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