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생각과 만날 때/자세와 몸짓이 말해주는 당신의 감정
우리는 다른 사람의 몸과 자신의 몸을 비교하면서 몸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형성한다. 여기에 상업주의 미디어가 연일 외모에 대한 관념을 부추기는 현상이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렇게 형성된 관념은 곧장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근육질 몸매에 대한 선망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자신의 몸을 볼 때 초라한 감정을 느낀다. 큰 키에 대한 선망이 있는 키 작은 사람은 키 큰 사람 옆에 섰을 때 굴욕감을 느낀다. 그래서 키 큰 사람 옆에 서는 것이 부담스럽다.
벗은 몸에 대한 관념이 실제 자신의 벗은 몸과 접촉할 때, 가령 ‘나체는 불경(不敬)하고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관념이 있다면 부끄러운 감정이 일어날 것이다. 오래되었지만 단적인 예로, 초기 기독교는 몸을 죄악시했기에 하와이로 갔던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은 욕망이 자극받을 것을 우려해 그 더운 날씨에도 옷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지냈다. 원주민들이 거의 벗은 채로 유유자적하는 동안에 선교사들은 두꺼운 옷 속에서 더위와 풍토병으로 죽어갔다(반대로 벗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나체족도 있다).
이것은 단지 생각이 빚어낸 참사이다. 바버라 호버만 레빈(Barbara Hoberman Levin)이 말한 것처럼 “몸은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다(Your body believes every word you say).” 위에서 말한 초라함, 굴욕감, 죄의식은 생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뚱뚱하고 못생긴 내가 싫어!”라고 말하면, 몸은 혐오감을 느낄 때 일으키는 화학반응을 그대로 가동한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뇌는 전기적 흥분을 일으켜 신경 호르몬을 혈액으로 흘려보낸다. 마치 전화기에다 대고 한 말이 전기적 신호로 바뀌어서 광케이블을 따라 전달되듯 생각은 신경 호르몬의 형태로 온몸에 전달된다.
감정 물질인 호르몬은 감정 반응을 일으키고 뇌 속의 시상하부를 통해 신체 반응으로 변환된다. 생각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감정은 신체 반응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신체 내부 반응으로는 심장박동, 혈압, 혈중유산염, 뇌파 등이 있고 신체 외부 반응으로는 안색, 동공, 표정, 자세 등이 있다.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감정은 몸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역으로 몸의 자세와 태도는 어떻게 감정을 강화할까? 격투기 선수가 상대를 때려눕히고 자신의 우월성이나 자부심을 드러낼 때 턱을 치켜들고 가슴을 확장한다. 가슴을 위로 확장하면 어깨에도 힘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러면 ‘거만하게 으스대는 마초’의 모습이 완성된다.
패배감은 어떠한가? 정반대의 자세가 만들어진다. 패자는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가슴의 압력은 줄어들어 무너지고 횡격막은 처진다. 그러면 호흡의 리듬은 활기를 잃는다. 우울감(심한 경우 우울증)을 느낄 때도 이와 유사하다. 뇌의 전두엽 하단과 연결된 뇌량 아랫부분의 혈류량은 줄어들고 당 대사도 떨어져 신경 활동은 저하되고 신체조직은 무기력해진다. 그러면 몸의 직립을 지지하던 관 구조의 조직도 느슨해져 전반적인 순환이 약화한다. 흥분감(심한 겨우 조증)은 이와 정반대다. 혈류량은 늘고 당 대사도 활발해진다. 관 구조의 조직은 수축하고 순환이 항진되어 혈압도 높아진다.
창피함을 느끼면 얼굴은 빨개지고 어깨는 머리를 집어삼킬 듯 위로 올라가서 위축된다.
우리는 자세를 바꾸거나 특정한 몸짓(gesture)을 취하면서 우리의 감정 상태를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게 되는데, 이것은 자세와 감정 사이의 관계가 지극히 불가분적이기 때문이다. 슬픔에 빠지면 근육 전체가 무력해지기에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늘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된다.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느낄 때는 동공이 확장된 채로 그 대상에 주의를 고정한다. 안도감을 느끼면 편히 쉬는 자세를 취하고 공포를 느낄 때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팔로 얼굴과 가슴을 보호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경멸을 느낄 때는 그 대상을 내려다보게 되고 존경을 느낄 때는 우러러보게 된다.
어깨를 으쓱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데.”, “난 모르겠어.”, “나한테는 책임이 없어.”와 같은 약한 자기방어적 감정을 나타낸다. 상대방의 제안이나 태도를 완강히 거부하기 어렵거나 받아들이기도 모호할 때 이런 몸짓을 하게 된다(이것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역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자세나 몸짓을 연구하고 연습하기도 한다).
특히 남성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가랑이를 벌리고 선 자세는 전형적으로 우월감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 자세는 몸을 넓혀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은밀하게 성기를 과시하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쩍벌남’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공공장소에서 등을 깊숙이 기대고 다리를 벌리고 앉는 행위는 무의식적 우월감에 따른 영역 확대 시도다. 반대로, 구걸하는 자세는 자신의 공간을 최대한 위축시킴으로써 내적인 붕괴상태를 보여준다. 현재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제발 자신을 도와달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몸의 자세로 내보인다.
짝다리 짚고 서 있는 자세는 지금 하는 일이 만족스럽지 않거나 하기 싫은데도 해야 할 때 나타난다. 또한, 그 자리에 오래 있고 싶지 않을 때나 일어나는 상황이 마뜩잖을 때도 이 자세를 취하게 된다. 턱을 들어 올리고 가슴을 내미는 자세는 자만심을 드러내며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겠다는 내적 태도를 드러낸다.
특정 자세나 몸짓은 그에 따른 특유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어서, 여러 사람이 똑같은 자세를 취하면 서로 동일한 감정을 경험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군대의 일사불란한 사열 의식이 구성원의 전투 감정을 고취하는 역할을 했으며, 원시 부족 간의 소규모 전쟁에 앞서서도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면서 결속감과 전투 감정을 끌어올렸다. 이것은 그것을 관람하는 사람에게도 강렬한 영향을 미쳐서 집단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아이돌 그룹의 소위 ‘칼 군무’도 같은 역할을 한다. 강렬한 동작 일치가 그룹 구성원 간의 감정 일치를 이끌고, 나아가 청중에게도 효과적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가 가장 열광적인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신이 자주 취하는 자세는 무엇이고, 이 자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기본적인 감정 수준을 헤아려 바로잡는 데 도움을 준다. 거듭된 실패로 어느새 자세도 위축한 채로 고정되지는 않았는지, 반대로 거듭된 성공으로 “내가 제일 잘 나가!”라는 감정이 어깨에 힘을 주고 턱을 치켜들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살펴볼 일이다.
감정이 양극단으로 움직일수록 고통은 커진다. 거듭된 성공을 선망하겠지만 그 성공이 어깨에 힘을 주게 만든다면 ‘성공의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인도의 고전이자 세계의 고전인 ‘바가와드기따(Bhagavadgita)’는 성공과 실패를 같은 것으로 보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평정심에 자리를 잡게 된다고 말한다.
평정심에 자리 잡은 몸은 치우침이 없다. 긴장도 없고 경직됨도 없다. 무너짐도 없고 늘어짐도 없다. 그 몸은 으스대는 자세를 취하지도 않고 슬픔과 실망감에 고개를 푹 숙이지도 않는다. 그의 몸은 양극단을 벗어났기에 지구의 힘인 중력의 수직선과도 조화를 이룬다.
“몸의 자세와 마음의 상태 간의 상관성은 의학 및 심리치료의 장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구부정한 자세는 의기소침한 상태를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풀이 죽은 상태를 일으킬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경직되지 않은 똑바른 몸의 자세는 평화로운 상쾌한 상태를 말해주고 있으며 또 그 상태를 일어나게 한다.” - 리처드 질레트(정신과 의사)
옷으로 몸을 가리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에게 있어서 옷이란 신체 보호를 넘어 자신의 사회적 위상과 내면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써도 활용된다. 그런 까닭에 옷은 자세와 몸짓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되었다. 예컨대, 심(일명 뽕)을 넣어 어깨가 넓어 보이는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면 잠시 자신감에 도취하게 된다. 어깨에 휘장을 달고 과장되게 부풀린 패션에는 권력자의 위세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겨있고, 다림질로 칼같이 각을 잡은 군인의 복장은 흐트러짐 없이 강인하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동물의 세계에서와는 달리 성징을 직접 드러낼 수 없는 인간 사회에서 패션은 그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코르셋으로 상징되는 여성의 성적 매력을 부풀리는 패션은 그때그때 유행을 달리하며 상업적 미디어를 등에 업고 자본주의 시대를 유유히 관통해왔다. 자신이 얼마나 성적으로 매력 있는 존재인지 알리고 싶은 욕구를 교묘히 자극하고,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광고로 부추기며 패션은 거대 산업이 된 지 오래다.
오늘날 탈코르셋, 여성해방, 성평등의 이슈에도 불구하고 본능에 내재한 섹스 코드는 탈색되지 않기에 섹스 어필은 여전히 유효한 패션의 주요 목적 중 하나이다. 남녀불문 생물학적 욕구는 패션을 통해 때로는 에둘러, 때로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수컷 공작이 꼬리 깃털을 펼치는 순간 멋짐이 폭발했다는 식의 표현을 직설적으로 바꾸면 수컷 공작이 암컷 공작 앞에서 수컷다움을 외모로 어필했다가 된다. 패션의 섹스 코드와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인간의 관점에서 꽃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공작의 꼬리 깃털에 감탄하지만 정작 그들은 생물학적 임무에 진심일 뿐이다. 종의 보존이 달린 너무나 막중한 임무라서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섹스 어필 중이다. 이점에서는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특히 유행의 첨단에 있는 젊은 연예인들을 보면 패션의 섹스 코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다양한 패션 중 가장 독특한 현상의 하나인 유니폼은 목표지향적인 집단의식을 드러내기에 안성맞춤이다. 유니폼은 이른바 ‘같은 자세’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같은 옷을 착용함으로써 같은 마음가짐을 가졌음을, 다시 말해 “우리는 팀 스피릿(team spirit)을 공유하고 있다.”라고 역설하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유니폼이 지닌 의미를 몸소 실천하려 하거나, 또는 자신도 모르게 실천 당하게 된다.
이 말이 다소 과장되고 사회과학적으로 입증된 바도 없지만, 예비군 훈련 경험이 있는 예비역이라면 공감하게 되는 “평소에는 멀쩡한 사람도 예비군복만 입으면 개가 된다.”라는 말은 일탈마저도 정당화(법적으로는 아닐지라도)해주는 유니폼의 힘을 말해준다. 평상시의 자아가 예비군복 뒤로 숨어서 예비군적 정체성으로 갈아탄 것이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예비군에게만 묵시적으로 허용되는 껄렁한 행동이 느슨한 사회적 동의 속에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곳을 벗어나 예비군복을 벗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돌아온다.
패션에 대한 집착은 자아상에 대한 집착과도 상통한다. 특정 패션만을 고집하는 태도는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강한 자아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표시이다. 그들은 자기주장이 강하며 그냥 특별해지고 싶다. 반대로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는’ 패션은 분명하지 않은 자아상 또는 자아상의 혼란을 드러내거나 약한 자기 존중을 나타낸다. 화려하거나 고급 브랜드로 자신을 과시하는 태도 이면에는 존중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자존감 약한 어린아이가 숨겨져 있다.
나는 어떤 패션을 고집하는가? 그 패션으로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자아상은 무엇인가? 반대로, 감추고 싶은 자아상은 무엇인가?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자아상과 자신이 느끼는 진정한 자아상은 일치하는가?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패션은 무엇인가?
“마음이 전 우주를 흐르고 있는 것과 같이 그것은 몸 전체를 흐르고 있다. 마음의 상태는 언제나 행동에 반영된다. 갈등하는 마음은 제대로 조화가 안 된 몸동작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 주디스 블랙스톤 《선(禪) 무엇이 세계를 움직이는가?》에서
다급한 마음은 다급한 행동을 낳는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은 이리저리 서성거리게 만들고 다리를 떨거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게 하고 동공을 뒤흔든다. 마음이 위기라고 느끼는 순간 몸의 내부에는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고 감정은 동요하고 행동은 허둥대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실제로 삶에 적용했던 것이 바로 동양의 수행 전통이었다. 특히 동양의 무예 전통에서 스승들은 제자의 기술적인 측면보다 내면의 상태를 중시했다. 무사들은 언제나 위기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고, 그들에게 죽음은 삶과 중첩되어 있어서 선(線)적인 인생 여정의 끝에 당도하는 그 무엇이 아니었다. 죽음은 지금 문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맞이할 수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칼을 든 적을 맞이하는 순간 죽음의 공포가 압도하면 지금까지 배운 검술은 허우적거리는 몸놀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죽음의 공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위축시킨다. 연습 때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다. 실전은 단지 상대와 검술의 우위를 겨루는 자리가 아니라 죽음의 공포를 직면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추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무사들은 그런 마음을 닦는 수단으로써 명상했고, 더불어 명상과도 같은 신체 수련을 병행했다. 예컨대, 13세기 이후 일본 무사들에게 불교 선(禪) 수행은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졌다. 무사들은 느슨한 자세로 고요히 머물며 불안정한 내적 흐름을 집중된 호흡으로 다스렸다. 이 과정에서 가슴은 편안해지고 등은 펴진다. 몸의 에너지는 하복부에서 안정되고, 그러면 몸은 자연스럽게 올곧아져서 균형 잡힌 자세가 갖춰진다.
무사들에게 명상은 충만한 내적인 힘을 기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단이었다. 그들은 명상으로 마음이 안정되고 균형을 찾을수록 검술뿐만 아니라 걷는 방법이나 몸짓 등 일상의 모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비단 무사에게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무문관의 일화 하나를 살펴보자. 법안 선사(885~952)의 법문을 듣기 위해 승려들이 모였을 때의 일이다. 법안 선사가 승려들이 점심 공양을 하기 전에 들어와 단상(壇上)에 앉아 손으로 발(簾)을 가리켰다. 그러자 두 승려가 함께 가서 발을 말아 올렸다. 이때 법안 선사가 말했다. “하나는 얻었고, 하나는 잃었다.”
왜 하나는 얻었고 하나는 잃었는가? 두 수도승은 일어나서 발을 마는 일련의 행동을 통해 곧바로 자신들의 수행 정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내면의 중심이 확립된 수도승은 스승의 갑작스러운 지시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지만, 그렇지 않은 수도승은 허둥대며 내적인 중심을 잃었다. 그것이 행동으로 고스란히 드러났기에 눈 밝은 깨친 스승은 잃은 자와 얻은 자를 분별할 수 있었다. “행동의 직접성과 힘은 수행자의 이해 정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인도 딴뜨라 불교의 중요한 창시자 중 한 명인 빠드마와즈라(padmavajra)가 자신의 스승이 될 아낭가와즈라(anaṅgavajra)를 찾아 헤매던 때의 일이다. “빠드마와즈라가 아낭가와즈라를 찾았을 때는 스승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와 함께 사는 여인에게서 바로 감동했다. 그녀는 모든 일 하나하나에 완전히 집중하였고 진리에의 깊은 침잠이 모든 동작을 통해 빛났다.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하고 춤을 추는 듯한 동작은 그녀가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는 것을 보는 동안 빠드마와즈라의 영적 이해를 심화시켰다. 그는 그녀가 걷고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 여느 불교 철학에 관한 담론을 듣는 것보다 더 심오하다고 느꼈다.”
마음의 상태가 행동에 반영된다는 사실은 현대의 행동심리학과 인지심리학의 기본원리이기도 하다. 이 원리를 기반으로 한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r Therapy)에서도 내담자의 행동이 어떤 심리적 기반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파악하고 행동수정을 통해 원인이 되는 ‘문제적 심리’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
일상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일은 그에 따른 심리적 자극을 부른다. 어떤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감정의 종류와 강도도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목소리와 몸짓에 드러난다. 더 나아가서 각자의 감정기준점에 따라 일상적인 행동 패턴도 달라진다.
“나는 손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방법을 통해 신경증 환자와 우울증 환자가 손을 움직이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확인하였으며, 치료를 통해 환자가 얼마나 개선되었는지를 알아냈다.”
- 폴 에크만
걷고, 서고, 앉고, 눕는 일상의 행동에서 움직임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일은 행동을 통해서 마음의 동요를 제어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자신의 감정기준점이 불안 수준이거나 우울 수준이거나 흥분 수준일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자의 감정기준점에 따른 특정 행동 방식이 습관처럼 반복되면서 감정기준점을 강화한다는 사실이다. 감정 수준과 행동 방식이 맞물리면서 뇌 신경망을 강화한다. 강화된 뇌 신경망은 행동 방식을 마치 기계처럼 자동화한다.
이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행동 방식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예컨대 어떤 임무가 주어져 그 일을 수행할 때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긴장하고 있다면 그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런 다음 행동 방식을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어깨의 긴장을 푸는 법을 실행한다. 그러면 그 과정을 통해 어깨를 긴장하게 만드는 심리적 원인도 제거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설계한 대로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 마치 운동선수가 자세(form)를 교정할 때와 같다. 그러면 새로운 행동 방식이 오래된 행동 방식을 완전히 밀어내고 자리를 잡는다. 뇌 과학적인 용어를 써서 달리 표현하면, 오래된 신경망(시냅스)이 장기 억압되고 새로운 신경망이 장기 증강된다.
60조 개의 세포와 140억 개의 뉴런이 유기적으로 얽히면서 심리 구조도 복잡해지고, 그에 따른 두려움(공포, 불안 등)의 종류도 다양해진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효율적 전략으로 진화했지만,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괴로움으로도 작용한다. 뇌의 신경망은 섬세하게 몸의 모든 부분과 연동하여 복잡한 심리 작용을 시시각각 신체 반응으로 전환한다. 그중 두려움은 신체와 강한 상호작용을 일으킨다.
오랫동안 반복한 행위는 패턴으로 유기체에 자리 잡아, 같은 상황이 닥치면 무의식적으로 그 행위를 하게 만들어 신경망을 더욱 강화하고 연결된 신체 부위에 영향을 미친다. 심리 철학적 관점에서 까르마(karma)-상스까라-상사라 이론을 뒷받침하는 셈이다. 문제 심리나 행동의 뿌리에는 거의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으며, 신체심리치료의 궁극적인 목표도 이 두려움의 극복이다.
개별적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인간의 DNA에 새겨진 두려움은 보편성을 띠므로 일종의 신체 심리 지도(body-mind map)가 형성된다. 이것을 오스카르 이차조(Oscar Ichazo ; 1931~2020)는 까르마 존(zones of karma)이라고 불렀다.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종아리: 행동(action)에 대한 두려움.
무릎: 죽음에 대한 두려움.
허벅지: 부족한 체력(stamina)에 대한 두려움.
골반: 삶(life)에 대한 두려움.
복부: 호흡과 흡수에 대한 두려움.
생식기, 항문, 치골: 성(sex)에 대한 두려움.
좌골, 미골: 보존, 보호, 유지에 대한 두려움.
가슴: 슬픔, 비애.
손: 하는 것(doing)에 대한 두려움.
손목: 실수에 대한 두려움.
아래팔/팔꿈치: 처벌과 열등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위팔: 낙담, 의기소침에 대한 두려움.
어깨/견갑골/윗등: 책임에 대한 두려움.
허리: 패배(나약함)에 대한 두려움.
목덜미: 올바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
목 앞: 죄의식에 대한 두려움.
두피(scalp): 근심, 걱정에 대한 두려움.
이마: 곤혹, 혼란, 당혹스러움에 대한 두려움.
눈썹: 분노에 대한 두려움.
눈구멍(안구 주변): 편견에 대한 두려움.
광대뼈: 부끄러움에 대한 두려움.
코: 통제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법령(코 가장자리와 입 가장자리 부근): 실망에 대한 두려움.
입/입술: 비위 상함에 대한 두려움.
턱(아래턱): 열등감에 대한 두려움.
턱(저작근): 혐오, 반감에 대한 두려움.
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의사소통에 대한 두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