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어머니 팔순이셨을 때 식구들의 외식 때였다.
팔순 이벤트로 매달 한 번씩 외식을 했었던 재작년 실제 어머니 생신인 음력 10월 25일 즈음의 외식이었다.
가족 간 특별한 날이면 가끔씩 찾았던 봉가진이라는 안양에서는 나름 이름있는 한정식집에서의 외식이었다.
죽부터 육회, 구절판, 모둠생선회, 한방제육보쌈, 쇠고기산적, 전복요리, 대하요리, 더덕구이 등 19~20가지 정도의 코스요리집이다.
어머니와 사촌 형, 동생네 내외, 두 조카 경현이, 서연이와 함께하던 자리였다.
한참 식사와 술, 즐거운 대화가 오가던 중 동생이 학생 때 이야기를 꺼냈다.
고등학생 때 선도부였을 때의 이야기였다.
남자들한테는 으레 선도부에 대한 약간의 로망이 있다.
과시가 어느 정도 함유된 짧은 선도부 활약상이었다.
동생의 활약상을 이어받아 그다음은 내 차례였다.
나 역시도 중학생 때 선도부였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기 초에 담임 여선생님이 학급임원 어떤 것을 하고 싶으냐고 물으셨고 그 답변으로 나는 선도부를 하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너는 키가 작아 선도부는 안된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나는 선도부를 끝까지 고집했고 결국은 선도부를 시켜주셨다.
내가 선도부를 원했던 것은 권력욕이었다.
그 이전에는 규율부로도 불리던 선도부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막강한 권력이 있었던 학생 임원이었다.
1983년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윤흥길의 소설 <완장>은 권력의 광기,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속물적 근성을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
MBC 베스트셀러극장과 MBC 월화미니시리즈를 통해서 두 차례 드라마화되기도 했다.
권력의 광기에 사로잡힌 <완장>의 주인공 임종술이 그 당시의 내 모습이었다.
선도부 당시 2학년 선도부는 1학년 같은 반의 규율을 잡는 게 임무였다.
쉬는 시간마다 1학년 교실로 내려가 규율을 잡았다.
후배들이 숨이 막히고 공포를 느낄 정도로 엄격하게 대했다.
떠드는 소리가 들리면 찍소리도 못하게 조용히 시키고 만화책도 죄다 압수했다.
간혹 빨간책이라는 성인용 불온서적도 압수했다.
원칙은 압수물품은 선도부에 제출하는 것이지만 형식상 제출하는 몇몇 제출물 이외는 대부분 개인점유물이 되었다.
2학기부터는 아침 등교 시간에 교문 앞에서 선도부 완장을 차고 어깨에 힘을 잔뜩 준채 등교하는 학생들의 교복 복장을 체크하면서 권력의 위상을 치켜세웠다.
규율을 잡기 위해 많은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 어린 시절 1년 동안 행했던 폭력을 통해 어떠한 이유로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이기적으로 은연중 깨닫게 된 것 같다.
그 시절 모든 후배들에게 죄송하고 진심으로 사과한다.
<완장>하면 황순원의 작품이 먼저 생각났었는데 이제는 인터넷에서도 제대로 검색이 안된다.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는 작품이 된 거 같아서 안쓰럽게 생각된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소싯적 깨달음은 그 이후 어떠한 경우에라도 비폭력을 행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쉬는 시간 쓰레기 소각장 옆에 모여서 흡연들을 했다.
모르는 얼굴이 있다면 어김없이 1학년이나 2학년이었고, 3학년들은 그런 후배들을 가만 안 두었다.
폭력으로 응징했다.
그때마다 나는 항상 3학년들의 폭력을 적극적으로 막았었다.
군 복무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단기사병이라 불리던 18개월 방위 복무를 했었는데 일병 말호봉쯤 되니 고참들이 군기 당번을 맡겼다.
하루는 고참병 중 한 사람이 아래 애들 집합시켜 군기를 잡으라고 했다.
아래 기수들을 집합시켜놓고 모두에게 담배 한 개비씩 돌렸다.
제대로 못하면 고참들이 지휘관들에게 깨지고 그러면 모두가 군 생활 피곤해지지 않겠냐고 하면서 다들 안 깨지게 잘해보자는 말로 집합을 끝냈다.
그 모습을 고참들이 멀리서 숨어지켜봤고 머리 박아 한번 한 후, 군기 당번은 다음 기수로 넘겨졌다.
덕분에 고참군에 들어 오히려 편해졌다.
나의 선도부 시절 악행을 들었던 조카 경현이가 마치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연상된다고 한다.
고등학생 2학년 얘한테서 이문열의 작품을 들으니 오히려 내가 놀랄 판이었다.
아마도 교과서에 수록된듯싶다.
문득 조카에게 책 몇 권 사서 보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알베르트 까뮈의 <이방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트문트(지와사랑)>,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 정도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내 고교 시절의 내가 반추되었고 책 선물의 생각을 접었다.
접었다기보다는 나중으로 미뤘다.
얼마 안 있어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고3이 되는 아이였다.
조카가 나와 같은 전철을 밟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조심해한다.
고교생 때의 나는 책 읽기를 참으로 좋아했었다.
내 주변 환경도 한몫했다.
고등학생 1학년 그 당시의 나는 한 단체에 속해있었는데 그 단체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흥사단 산하 고등학생 아카데미라는 단체였다.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 독서토론회나 주제토론회를 했었던 모임이다.
그때 토론했던 책 중 생각나는 것들이 해방전후사의 인식, 철학에세이, 역사란 무엇인가 등이다.
모임은 의식의 변화 과정을 경험하게 해줬고, 우리 사회를 보는 새로운 눈을 경험하게 해줬다.
그때 당시의 동기 23명이 지금도 카카오톡 단톡방을 함께하고 있다.
40년 된 진한 우정이다.
또한, 이 시기부터 나에게는 인생의 스승이 되는 사람들이 생겼다.
헤르만 헤세, 알베르트 까뮈, 프란츠 카프카, 생떽쥐베리가 그들이다.
고등학생 때 그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어떤 점에서는 불행스럽기도 하고 어떤 점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아카데미라는 모임과 새로 생긴 인생의 스승들은 나에게 학업을 멀리하게 했다.
교과과정의 책보다는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켜주는 책이 손에 잡혔다.
물론 그때 당시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그 시기가 돌아온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하지만 조카에게 같은 선택을 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 무렵 나의 스승들과 섭렵했던 그들의 작품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헤르만 헤세는 수레바퀴 밑에서, 데미안,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유리알 유희 등의 작품을 통해서 내면적 성찰에 의하여 자신을 탐구하였던 내 인생 최고의 스승이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라는 데미안 속의 문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평생의 명제로 남았다.
"피 땀 눈물"의 BTS에게도 명제로 남았었던 거 같다.
작가이자 화가로서의 두 예술 장르를 넘나들었던 헤세는 나에게는 살아가야 할 길을 앞서서 보여준 진실한 스승이다.
헤세는 실제로 3000여 점에 이르는 수채화를 남겼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그림에 소질 있다는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 막연히 했던 생각 중 하나가 나이 오십 줄 어느 정도 넘으면 생업도 다 내려놓고 소일거리로 헤르만 헤세 등 존경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다시 다 읽어보는 유유자적한 삶을 살줄 알았다.
따뜻한 햇살 아래서 말이다.
신은 참으로 내 인생을 껄끄럽게 하는 재주가 좋으시다.
알베르트 까뮈는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부조리 문학의 대표자이다.
많이들 아시겠지만, 이방인, 페스트 등의 실존적 소설과 시지프스 신화와 같은 철학적 에세이가 유명하다.
사르트르, 앙드레 말로, 보부아르, 생떽쥐베리, 카프카 등과 함께 실존주의 철학 사상을 문학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까뮈는 작품세계를 통해 부정, 긍정, 사랑을 표현하려고 했었고, 부정 즉, 부조리에 대한 표현이 이방인과 시지프스 신화에 잘 녹아있다.
페스트나 그 이후의 작품을 통해 긍정과 사랑을 표현하려 했겠으나 교통사고로 생을 달리하면서 끝맺음을 할 수 없었다.
생전에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엊그제, 지난해 마지막 날 밤에 2년 선배인 만열이 형이 포항 사시는 누님이 보내신 과메기를 먹자고 성훈이, 종호와 나를 집으로 불러 새해 첫날까지 술을 펐다.
만열이 형은 23명의 우리 동기 중 우리 셋을 각별히 챙긴다.
거의 한두 달에 한 번씩은 만찬 자리를 만들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항상 사람을 즐겁게 하는 유쾌한 성격이 좋고 그 형의 내재된 변치 않는 측은지심은 더더욱 좋다.
베푸는 것을 너무 즐겨 하는 사람이다.
월드컵 얘기하다가 고등학교 시절 내 축구 무용담을 풀어놓으니 다들 너무도 부정적이다.
도저히 안믿긴다는투로...
축구 잘 차는 얘 하면 항상 첫 번째로 손꼽히던 축구 실력이었는데 이 인간들이 못 믿겠다며 부정을 한다.
학교가 다들 달라서 본 적이 없으니 무조건 못 믿겠단다.
공을 잘차는 얘가 맞는 어법이겠지만 우리들은 축구를 잘찬다고 표현해왔다.
'알베르트 까뮈도 축구 선수였다, 골키퍼"라고 하며 까뮈와 나를 동일선상에 올려놓으려고 하니 성훈이 놈이 말한다.
"전두환도 축구 선수였다"
아는 거 많아서 좋겠다.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배웠다.”라고 까뮈는 말하기도 했다.
지금도 어쩌다 밤잠에 축구하는 꿈을 꾸면 다음날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
프란츠 카프카는 심판, 변신, 시골의사, 성 등의 작품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적 자아를 잘 표현했고 부조리에서 오는 소외감을 잘 나타낸 실존주의 소설가였다.
실존의식뿐만 아니라 잠재의식까지도 글로 남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해 준 천재적 작가가 내가 경험한 카프카였다.
동시대 같은 유대인이라 가까웠던 아인슈타인도 카프카에게 천재라고 칭했을 정도였다.
둘이 함께 즐겨 찾던 카페가 지금도 프라하에서 영업 중이라고 한다.
40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기 전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달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다행스럽게 유언은 어겨졌다.
그 소설들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브로트는 유언을 어겼고, 카프카의 작품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출판되었다.
나도 유언으로 내가 쓰는 글들은 삭제해 달라고 할까 보다.
그보다는 소설을 먼저 쓰는 게 순서일 것이다.
실존주의, 행동주의 작가로 평가되는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 남방 우편기, 야간비행, 성채, 인간의 대지 등도 나의 독서이력에 들어가 있는 것들이다.
당연하게도 내가 섭렵한 위에 나열한 작품 중 내용이 지금까지 기억되는 작품은 없다.
단지 작품명만 기억될 뿐이다.
삼국지처럼 십 년에 한 번 정도는 남은 여생 동안 재차 반복해서 읽어보고 싶다.
사오 년 전쯤 동생과의 둘만의 술자리에서 들었던 말이 있다.
어렸을 때 책장에 빽빽하게 책을 채워줬던 게 참으로 고마웠다고 마치 간증하듯이 말했다.
찬란했던 청춘의 시대, 용돈이든 어떠한 형태의 수입이든 나에게 돈이 생기면 그중에 50% 정도는 친구와의 술값 등의 유흥비였고 나머지 50% 정도는 도서구입비였다.
책장에 빽빽하게 채워지는 책들을 보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실감되었다.
헤르만 헤세부터 까뮈, 카프카, 생떽쥐베리의 작품들, 톨스토이 전집, 이문열, 조정래, 박경리, 조세희, 박범신, 황석영의 작품들, 황지우, 정호승의 시집들이 책장에 채워졌다.
동생은 대학 다닐 때 수업에 안 들어가고 거의 도서관에서 책 보면서 지냈다고 한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에 안 들어가서 학점에 구멍이 나도 도서관에 가서 보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보았다.
그 비싼 대학 등록금을 내면서 엄청 비싼 독서들을 했었던 거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두 형제는 똑같이 불효를 했고 부모님께 너무 죄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