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글을 쓰는가요- 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오랜 대답은 우울을 보관하기 위해서, 였다. 우울에는 아래로 가라앉으려는 성질이 있어서, 처음에는 온몸의 핏기가 가시듯 천천히 혈관을 따라 빠져나왔고, 그 다음에는 내면의 수조 위를 떠다니며 덩어리를 졌다. 덩어리진 우울이 빙글빙글 수조 밑으로 가라앉으면 나는 조용히 낚아챘다. 무른 감촉에 온순하다는 착각이 들 법했지만, 언제든 손에서 미끄러질 위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담아둘 곳이 필요해서 글을 썼다.
글은 목이 좁은 유리병의 모습을 해야 했다. 어릴 때 유리를 녹이는 실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딱딱한 유리도 흐물흐물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걸 늘려서 식히면 새로운 모양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배웠다. 필요한 건 중불에 올려놓고 달궈질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과, 흐물거려서 무엇도 되기 전인 반죽에서 형태를 뽑아내는 세심함이었다. 나는 우울의 크기에 맞춰 병을 늘리거나 줄이거나 했다. 실패의 경우는 차분히 흘려보내고서 다음번에 찾아올 우울을 기다렸다. 유리병들은 불투명해지지 말라는 당부를 표면에 새긴 채로 굳어갔다.
시간이 흘러 나는 우울을 제법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쓴다는 건 우울을 포획하는 일이고, 포획한다는 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일이고,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무엇이든 그럴듯해 보였다. 남들에게 보여주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 같았다. 제 우울의 관객이 되어주세요. 병에 갇혀있으니 전염되지 않아요, 가만히 안을 들여다보아 주세요. 그래도 괜찮다면 친구가 되어주세요- 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차곡차곡 쌓이는 정사각형 격자들의 안정감. 무언가를 진열하기에 꼭 적당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올려야만 한다는 제한도 일종의 머천다이징이라고 생각하면 자연스러웠다. 이건 라벨지다. 라벨지를 먼저 살핀 다음, 유리병을 집어 들여다보는 순서인 거다. 매번 새롭게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다. 글을 쓰는 순간에 마주한 세상의 모습이, 마음 속의 풍경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 법이었으니까. 폴더를 열어 예전에 찍어둔 필름 사진 중 적당한 하나를 골랐다. 과거와 현재의 일대일 대응이 정직하게 이루어졌다. 서로 다른 우울 사이에도 닮은 점은 있는 거라고, 모든 우울이 외롭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했다.
매번 그렇게 썼다. 우울을 건져올리고, 유리병을 짓고, 라벨을 붙여서 올려두었다. 어느새 나의 인스타그램은 크고 작은 우울의 진열장이 되어있었다.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병을 쓰다듬으면 나는 고마움에 몸을 떨었다. 이상한 일이지, 유리병은 손길을 탈수록 더 은은하게 빛을 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유리병 안의 우울이 살갗을 흐르는 열에 반응하는지도 몰랐다. 더 많은 열을 채집하고 싶어서, 그러므로 나의 우울이 황홀하기를 원해서 책을 만들기로 했다.
그때, 갑자기 행복이 바싹 밀려들었다. 넘실대며 등을 떠밀어와서 공중 높은 곳에 데려다 놓았다. 매일의 햇빛과 구름이 아름다웠다. 잠에 들었다가 다시 일어날 때에도 어제의 환함이 여전히 남아있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는 금세 어리둥절해버렸다.
모든 동작이 정지한 가운데 시간만이 제 속도로 움직였다. 가라앉는 것이 없으니 낚아챌 일도 없어졌다. 수조가 비어서 나는 글쓰기를 멈추었다. 조바심에는 미치지 못한 궁금함으로,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자문해보았다. 글을 쓰는 일과 지금의 행복을 저울질할 생각은 없다. 하나가 시작되면 다른 하나는 정말 멈추어야만 할까. 그건 너무 난폭한 일이다. 나는 우울의 진열장을 다시 한번 열어보았다. 그래, 우울을 건져올릴 수 있다면 행복을 매만지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결심했다. 행복을 쓰자.
그리고 아직, 나는 결심의 언저리를 맴도는 중이다. 행복의 쓰기는 아득해서 꼭대기가 보이지 않고, 대개는 발치에서 돌아간다.
돌이켜보면 제자리에서 행복을 관찰해본 기억은 거의 없다. 운이 좋아서 몇 번의 행복을 경험했지만, 그마저도 지나간 뒤의 흔적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다. 행복은 우울과는 달라서, 가라앉기보다는 자유롭게 유영하기를 원하니까. 관측하는 동시에 위치를 놓쳐버릴 정도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편이니까. 애초에 유리병 안에 가두겠다는 비좁은 생각부터가 무리인지도 모른다. 왜냐면 행복은 배어나와야 하는 것이거든, 테두리를 그려두었더라도 누군가의 손이 닿는 순간 배어나와서 옮아가야 하거든.
만약 유리가 아닌 천이었더라면, 내가 배운 게 가열과 냉각이 아니라 시침질과 박음질이었다면 더 나았을까. 주어진 크기에 맞춰 병을 제조하는 게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씨줄과 날줄을 엮다가 이쯤에 행복이 담겨 있겠지- 라는 낙관으로 멈추면 되었을까. 어쩌면 행복을 쓰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는 이제껏 배워온 글쓰기의 방식을 잃어버려야 할 거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낯선 문법 사이에서 군데군데 멈춰야만 할 거라고,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다고. 잃어버리는 게 멈춰서는 게 두려워서 나는 가끔 뒤를 돌아보지만, 길을 건너갔을 때 만나게 될 누군가를 떠올리며 이내 몸을 붙든다.
행복을 쓰고 싶다. 행복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공기 속에 떠다니는 행복을 둥글게 감싸면 전구가 되고, 진열장 바깥까지도 환하게 밝힐 수 있겠지. 나의 글을 읽는 타인의 얼굴에 행복이 깃드는 모습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답을 알지 못해서 나는 계속해서 쓴다. 그런 날이 오면 부디 관객들이 나보다 더 빠르게 알아채주기를, 먼저 친구가 되어주겠다며 손 내밀어주기를 소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