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석원 Sep 23. 2022

불안감에 쫓기는 삶

열심히 살지 않을 용기 part2

이 전 글을 쓰다 보니 오랜만에 학생 시절의 기억들이 떠올라 감성적인 하루를 보냈다. 10년이 넘은 얘기지만 지금이 남은 인생에서 그때를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순간일 테니 조금 더 글로 남겨보려고 한다. 역시나 열심히 살지 않을 용기를 가지게 해 준 일들이다.


내가 졸업한 한국과학영재학교(KSA)는 전국에서 입시가 가장 치열한 학교 중 하나였다. 지금은 나아졌지만 매우 높은 선행학습과 문제풀이 능력을 요했고, 시험과 면접으로 30대 1이 넘는 경쟁을 뚫어야 했다. 주로 1차 서류 평가로 2-3천 명, 2차 필기시험으로 200여 명을 추리고, 3차는 2박 3일 캠프식으로 학교에서 합숙하며 다면평가를 통해 선발한다. 오늘 얘기하고 싶은 일은 3차 캠프에서 있었던 일이다.


학교에서도 중학생들 200여 명에게 자유시간을 줄 수 없으니 프로그램 중 하나로 저녁 식사 이후에 강당에 모여서 영화를 보여주는 시간이 있었다. 당시 철학 선생님(교사보다 본인이 철학자에 가까운 분이셨다)이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대사도 거의 없는 인도 영화를 보여주셨는데, 맨 정신에도 보기 어려운 영화를 당장 내일 시험을 앞둔 아이들에게 보여주니 다들 죽을 맛이었다. 그러다 몇 명이 책을 꺼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너무 인상 깊었다. 지금 책 몇 장 더 봐서 내일 시험을 잘 보려고 하는 건 요행을 바라는 거다. 그러니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영화나 봐라라는 말씀이었다.


지금 책 몇 장 더 봐서 내일 시험을 잘 보려고 하는 건 요행을 바라는 거다.


요행을 바란다라. 생각해 본 적 없는 관점이었다. 나한테 익숙했던 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남들 영화 볼 때 숨어서 책이라도 한번 더 봐야지 같은 얘기였는데 시험 전날 공부하는 학생에게 요행을 바라지 말라니 너무 신선했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너무 맞는 말이다. 지난 몇 년을 준비해온 중요한 시험을 하루 앞두고, 책을 1-2시간 더 본다고 결과가 바뀔까? 만약 그래서 떨어졌다면 어제 책을 안 본 내 잘못 일까 아니면 지난 몇 년을 회고해야 할까? 어쩌면 정말 공부를 위한 다기보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떨어졌을 때 그래도 최선을 다 했어라며 정신 승리하기 위한 게 아닐까?


그 이후로 시험을 볼 때마다 지키는 게 있다. 다들 시험지를 받기 직전까지 책을 보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나는 책상을 미리 정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후후 요행을 바라는 것들'이라며 살포시 비웃어 준다. 그리고 다들 이미 3-4차례 검토한 답안지를 제출 직전까지 훑어볼 때, 나는 한 번 검토하고 시간과 상관없이 그냥 제출해버린다.


쉬운 것 같지만 실천에 옮기기는 꽤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평생 세뇌를 당해 왔다면 더 어렵다. 불안하고, 조급하다. 풀지 못한 문제가 있으면 시작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볼 걸 싶고, 실수라도 하면 그때 한 번 더 검토할 걸 하며 후회한다. 한 발 떨어져서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만큼 관성을 이겨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또 한 번 열심히 살지 않을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처음에는 훨씬 불안하고 힘들었는데 신기하게 하다 보니 익숙해지더라. 오히려 덕분에 큰 일도 호들갑 떨지 않고 슥슥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학생 때는 시험이었지만 사회에 나와도 비슷한 일들이 많이 보인다. 작은 행동이지만 이전 이야기와 더불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삶에 대한 태도를 고민하고 선택하게 한 일들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