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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석원 Nov 20. 2022

성인이 된다는 것

선택과 책임, 그 무게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성인이 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 만 19세가 되면 성인이 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아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사적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 법률행위의 주체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권리 등이 부여된다. 그러나 한 사람이 온전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건 매우 어렵고 많은 고뇌가 필요한 과정이다. 온전한 성인이란 숱한 불확실성이 난무한 세상에서 선택을 내리고 그 책임 역시 온전히 지는 능동적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정해진 규율만을 따라 살거나 모든 결과를 남에게 떠넘겨 버리는 것은 미숙한 수동적 객체로서의 삶이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시민

능동적 존재로서 성인을 처음 개념화한 건 고대 아테네의 시민이다.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시민이란 도시의 거주민이자 사유 재산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며 공동체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구성원을 뜻한다. 아테네를 민주주의의 시작처럼 얘기하지만 실상은 아테네에 거주하는 모든 구성원이 시민이었던 것은 아니다. 외국인과 노예는 시민권이 없었으며, 여성 역시 매우 제한된 권리만이 인정되었고, 일정 기간 이상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면 참정권을 박탈당했다. 능동적 존재가 된다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데카르트의 주체와 객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통해 생각하는 존재(주체)와 생각의 대상이 되는 존재(객체)를 구분하고 있다. 당연한 얘기처럼 느껴지지만, 의지를 가진 신과 신의 피조물로서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중세 세계관을 뒤엎고 인간을 세상의 중심에 둔 발언이었다.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출발점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가 있다. 나는 오로지 나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능동적 주체로 살기 위한 첫걸음이다. 아쉽게도 산타는 없다.



칸트의 자유

데카르트의 생각을 이어받아 칸트는 능동적 주체로의 삶을 자유라는 개념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내린다. 무슨 옷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등 사소한 고민부터 직장이나 진로에 대한 고민까지 다양한 선택을 내리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이런 선택을 다른 사람의 강요 없이 내릴 수 있으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택지가 있었다고 해서 모든 선택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나는 배가 고프니 밥을 먹은 거고, 목이 마르니 물을 마신 것뿐이다. 또 남들이 좋다고 하니 좋은 대학을 선택했고, 적당한 직업을 가졌다. 칸트에 따르면 이는 마치 떨어지는 공이 물리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 자유의지가 없는 것처럼 욕구나 상황 등 외부에서 이미 내려진 결정에 끌려다니는 수동적 객체로서의 삶이다. 진정한 자유는 내가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주어진 목적을 위한 최선의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선택과 책임이 한 쌍으로 붙어 다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따라, 내가 선택한 목적에 따라 행동한 결과에 책임질 수 있는 다른 누군가는 없다. 목적을 선택한 자가 책임을 지는 법이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는 나에게도 권한을 달라고 하지만 그 권한에 딸려오는 책임의 무게를 느껴본 사람은 권한도 없고 책임도 없는 게 행복하다는 말도 한다. 니체가 얘기한 고통도 많고 쾌락도 많은 삶과 고통도 없고 쾌락도 없는 삶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한 번쯤 고민해 볼 문제이다.



책임을 온전히 짊어지는 게 어려운 이유는 불확실성 때문이다.

네가 선택을 했으니 책임도 져야지라고 말하기에는 현실 세계는 선택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가 명료하지 않다. 그렇기에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이런 선택은 안 내렸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쟤가 잘 못한 거야' 같은 생각에 빠지기 쉽다. 때로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불확실성은 어떤 초월적 존재를 상정해 넘겨버리기도 한다. 신께 기도하며 좋은 일에도 이유를 찾고 나쁜 일에도 이유를 찾는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서는 알 수 없는 죽음을 신의 뜻을 어긴 자에 대한 심판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대로 산타는 없다. 성인이라면 꼭 내 잘 못이 아니더라도 결과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질 줄 알아야 한다. 


노력으로 해소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불확실성이 주는 결과까지도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야 말로 가장 어렵고 필요한 역량인 것 같다.
(출처: 불확실성을 대하는 태도 )


선택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성인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수천 년의 고민이 담긴 능동적 주체가 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20년이다. 심지어 앞에 10년은 기억이 잘 나지 않고, 뒤에 10년은 잘못된 선택을 내려 볼 여유조차 없는 K-교육의 시기이다. 선택과 책임은 어느 순간 익숙해지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는 조금 더 연습이 필요하다. 이제 성인이니 알아서 선택하고 책임져야지가 아니라 알아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비로소 성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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