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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석원 Nov 06. 2022

시장의 뒤틀림

스타트업에게 투자가 갖는 의미

모든 스타트업은 성장과 내실 사이에 딜레마를 느낀다. 투자에 기반한 성장은 필연적으로 빠른 속도를 최우선으로 둔다. 당장의 매출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비용을 키우고 인원을 늘려 J커브를 그리는 방향이다. 반대의 방향은 내실을 다지는 계단식 성장이다. 이 길은 어쩌면 투자를 받지 않는 게 더 이상적일 수도 있다. 느리더라도 매출을 일으키고 그 매출로 조금씩 인원을 늘리는 식이다. 스타트업을 운영하면서 위 두 방향 중 옳고 그름은 없다는 것, 과정은 어떻던 결국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두 방향의 중간을 택하는 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참고: 창업자의 딜레마)


사실 투자에 기반한 빠른 성장은 많은 희생을 가져온다. 내부 조직 문화가 무너지고, 기술 부채가 지속적으로 쌓이고, 커져버린 기업가치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따져보면 천문학적인 적자를 보면서 언제라도 문 닫을 수 있는 회사를 원하는 대표는 없다. 그렇다면 스타트업에게 투자가 갖는 의미는 무엇이고, 왜 그런 고통스러운 선택을 하는 걸까. 혹은 투자사는 왜 높은 리스크를 져서라도 스타트업에 투자를 하는 걸까. 이는 시장의 뒤틀림에서 기회를 잡기 위해서이다.



안정된 시장에서 성장할 수 있는 회사는 없다.

모든 회사는 나름의 성장 전략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성장하지는 못한다. 특히나 시장에서 뒤처진 회사가 성장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 다른 회사도 열심히 하기에 격차를 좁히기는 어렵고 시장은 대체로 1위에게 더 관대하다. 열심히 잘하자는 전략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신라면과 진라면의 30년 전쟁, 코카콜라와 펩시의 100년 경쟁 등과 같이 매우 긴 시간에 걸쳐 변화가 일어나는 시장이다.


그러나 안정된 시장도 시장의 근본이 흔들리는, 뒤틀림의 순간은 온다. 기술의 발전, 문화의 혁명, 인구 구성의 변화 등 이유는 다양하지만 기존의 상식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옛 것이 지나가고 새것이 오는 그날이다. 대표적으로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카메라의 경쟁에서 필름 카메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건, 애플 워치 판매량이 스위스 전체 시계 판매량을 추월하는 사건 등이다. 이런 시장의 뒤틀림은 매우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다. 필름 카메라 수요가 1/3 토막 나는데 3년이 채 안 걸렸고, 200년 전통의 스위스 시계는 불과 5년 만에 1위 자리를 애플에게 넘겨줬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정립되는 시기이다.



시장의 뒤틀림, 그 찰나의 순간을 잡기 위해 스타트업은 존재한다.

신생 기업이 기존 기업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결국 이 찰나의 순간을 잡아야 한다. 그게 스타트업의 존재 이유이자 전략이다. 이미 변화가 시작된 다음에 참전하면 너무 늦다. 결국 언젠가 올 시장의 뒤틀림을 예상하고, 미리 대비하여 그날이 왔을 때 누구보다 빠르게 새로운 질서에 깃발을 꽂아야 새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즉 스타트업에게 투자는 극심한 불확실성 속에서 기회를 잡기 위해 돈으로 시간을 사는 행위이며, 투자자에게 투자는 시장의 뒤틀림으로 재편성되는 질서 속에서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한 행위이다.


그렇기에 투자에 기반한 성장은 본질적으로 빠른 속도를 최우선으로 두는 것이다. 당장의 매출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인원을 늘리고, 공격적으로 비용을 태우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10명이 100만큼 일하는 것보다 30명이 150만큼, 50명이 200만큼 일하는 게 더 나은 시기이다. 이 시기의 회사에게 왜 돈을 효율적으로 쓰지 않느냐는 질타는 무의미하다. 돈을 아무리 비효율적으로 쓰더라도, 최대 속도를 높이는 게 훨씬 중요하다. 투자금 100억 원을 쌓아놓고 아슬아슬 BEP를 넘긴 상태를 유지하며 마음의 위안을 삼는 건 대표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대표가 가장 고통스럽지만, 이 순간을 놓치면 다음 기회는 언제 올지 모르기에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성장을 선택하는 것이다.



성장과 내실을 결정하는 건 뒤틀림의 유무

여전히 많은 창업자들을 고민에 빠뜨리는 성장과 내실 사이에서 깊은 고민도 시장의 뒤틀림과 무관하지 않다. 시장의 뒤틀림이 없으면 시간을 비싸게 돈으로 살 필요도 없고, 성장에 수반되는 고통도 필요하지 않다. 내가 목표하는 시장이 5년 뒤, 10년 뒤에도 비슷한 형태로 유지된다고 하면 최대한 내실을 다지면서 찬찬히 성장하는 것도 매우 좋은 전략이다. 또, 아직 뒤틀림의 형태나 시기를 가늠하기 어렵다면 조금 더 여유를 가지면서 시장을 관찰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변화하는 모습이 보이고, 지금이 아니라면 그 변화에 동참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면 그때가 성장에 기업의 모든 걸 걸어야 하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투자는 결코 성공 지표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투자는 망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더 큰 기회를 잡기 위한 도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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