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의 성장이란 조직에서 개인을 지우는 과정
경영은 본질적으로 개인이 아닌 시스템을 다루는 학문이다. 과거 가내수공업 수준의 생산 구조에서는 경영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산업구조가 복잡해지고, 가족 규모를 넘어서는 기업 조직이 생김에 따라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나타난게 경영학이다. 기업은 가족과 다르게 구성원 전원이 이해관계로 엮여진 조직으로,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회사를 떠날 수 있는 매우 취약한 공동체이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방안이 바로 시스템이다. 즉 기업 경영이란 태생적으로 개인을 지우고 시스템으로 동작하는 조직을 추구한다.
동시에 이 지점에서 많은 개인들이 무기력함을 느낀다. 조직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 톱니바퀴 하나에 불과하다는 박탈감, 조직과 시스템 앞에 무력해진 개인의 존재에 대한 비참함 등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는 피할 수 없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이런 무기력함을 떠나 주도적으로 일하기 위해 사람들이 스타트업을 찾고, 실제로 만족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스타트업에서는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는 스타트업은 안정성을 전략적으로 포기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기업을 운영하다보면 안정성과 성장 사이의 선택이 필요한 경우가 있는데, 조직의 성장을 낮춰서라도 안정성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손쉬운 예로 80% 확률로 매출이 2배로 성장할 수 있지만 20%의 확률로 회사가 망할 수 있는 선택을 일반 회사는 내릴 수 없다. 일종의 편향-분산 트레이드오프가 경영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스타트업은 항상 망할 위험이 있는 선택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작은 스타트업에서 안정성을, 시스템에 기반한 운영을 선택한다는 건 그냥 무난하게 지겠다는 의미이다. 90%의 확률로 망하더라도 10%의 확률로 5배, 10배 성장이 가능하다면 기꺼이 감수하는게 낭만적이면서 현실적인 스타트업의 선택이다. 즉 다윗으로 골리앗을 이겨야하는 스타트업의 기본 전략은 의도적으로 분산을 높여 순간적으로 말도 안되는 업사이드를 노리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의 대체불가능한 역량이 시스템을 앞설 수 있는 이유가 생긴다. 마치 어벤져스처럼 뛰어나지만 이질적인, 합쳐질 수 없을 것 같은 인원들이 모여 우연과 우연이 겹쳐 빡 하고 고점을 찍는 그 순간이 스타트업이 성장하는 순간이자 생존하는 시점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초기 창업 멤버의 뛰어난 개인기에 의존하고, 어느 정도 규모가 커진 이후에도 시스템보다 개인들의 역량으로 굴러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청산해야 되는 레거시인 동시에 없어서는 안될 성장 원동력이며, 구성원들이 부품으로 전락하지 않고 주체성을 유지 할 수 있는 원천이다.
스타트업의 대표를 포함해서 초기 멤버들은 항상 모순적인 환경에 놓여있다. 다들 큰 회사의 부품이 되고 싶지 않고 더 주도적으로 일하기 위해 스타트업을 선택하지만, 스타트업의 성장이란 점점 큰 회사와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회사가 잘 될 수록 역설적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좁아지고, 시스템은 더 견고해진다. “나 없으면 안돌아가는 회사“는 나에게 큰 효용감과 만족감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회사가 아직 성장하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결국 “나 없어도 잘 돌아가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하고, 정말 잘해서 그런 회사를 만들고 나면 더이상 내가 행복하게 다닐 수 있는 회사가 아니게 된다. 마치 자녀를 길러내는 (사랑으로 키우지만, 어느 순간 자녀가 독립을 해버리면 허탈감을 느끼는 우리 부모님) 과정과 유사하는 생각도 든다.
(출처: 역할 내려놓기)
그렇다면 무게 중심이 개인에서 시스템으로 옮겨가는 시점은 언제일까? 정해진 답은 없다. 그 회사가 목숨을 걸 수 있는 꿈의 크기에 비례할 뿐이다. 생존보다 성장이 더 중요한 (성장하지 않으면 생존은 의미 없는) 단계에서, 생존을 담보로 한 성장을 택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생존과 성장을 모두 신경 쓸 만큼 여유가 생긴) 단계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그 전환이 이루어지면 회사 운영의 모든 게 달라진다. (참고: 사업의 성장 단계와 조직 운영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