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명자차
결명자차
겨울이 되면 진하게 우려낸 따끈한 결명자차가 생각난다. 눈에 좋고 몸을 녹여주기도 하지만 촌스러운 맛과 함께 결명자차는 내 가슴을 먼저 데워주기 때문이다.
어느 날 쓰레기로 방치된 학교 운동장 구석이 깨끗이 정리된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노란 꽃이 피어나서 냄새를 풍기던 구석 쟁이가 화사한 꽃밭으로 변했다. 그게 무슨 꽃인지 왜 그리도 많이 심었는지는 겨울이 오기까지 알지 못했다. 하루는 늦은 하굣길에 교장선생님이 모자를 눌러쓰고 작물을 털고 있는 것을 보았고 멀리서 보니 팥 같기도 했다.
겨울이 오면 시골 학교는 몹시 추웠고 찬 도시락을 먹기가 힘들었다. 그러든 어느 날 점심시간이 되자 방송이 나왔다. 당번 학생들은 주전자를 들고 숙직실 부엌으로 오라고. 보리차나 옥수수차를 주로 마시던 아이들에게 결명자차는 익숙하지 않았다. 어떤 친구들은 맛이 쓰다고 안 마셨지만 나는 진하게 우려진 뜨거운 차를 마시니 몸이 따뜻해지고 소화가 잘되는 것 같아서 좋았다. 교장선생님은 결명자가 눈에 좋다며 공부하는 학생들이니 많이 마시라고 했다.
내가 선생이 되어서 많이 생각나는 사람 중 한 분이 설 교장님이었다. 그분은 학교와 학생들을 돌보는데 몸을 아끼지 않으셨다. 학교 운동회도 그때가 가장 성대했고 온갖 행사도 많아서 조용하던 시골 학교가 분주해졌고 우리도 덩달아 신이 났었다. 학교의 이런 변화를 우리 모두는 예의 주시하며 말없이 지켜보았고 속으로 얼마나 고마워하며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시간도 길지 않았다. 교장선생님이 떠난 후로 우리는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더운 차를 마시지 못했고 교정은 바로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엄마가 돌아가신 친구네 같은 느낌이 들어 슬펐다.
운동장 주변에 널어선 플라타너스 외에는 별 볼거리도 없고 소박하기 그지없는 학교에 새 교장선생님이 오시자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침에 등교하면서 오늘은 무슨 꽃이 피었을까 궁금해서 화단을 먼저 둘러보고 교실로 가곤 했다.
나는 키 큰 글라디올러스를 좋아했고 미모사는 식물에 신경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지나가면서 꼭 건드려 보았다. 그런데 전혀 꽃 같지 않은 꽃도 있었다. 종이꽃이라지만 내가 보기엔 밀짚꽃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자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학교의 빈 땅 어디나 꽃과 나무를 심었으며 교장선생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우리 학교가 예쁜 꽃동산이 되자 읍에 사는 친척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우리 학교가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 마치 내가 그런 사람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한 적이 많았었다.
다른 교장들은 넥타이와 양복 차림으로 혼자서 넓은 교장실 큰 의자에 근엄한 표정으로 비스듬히 앉아 계셨다. 설 교장님은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목장갑에 호미를 들고 신발은 흙투성이가 된 모습이 더 많이 기억난다. 그래도 난 그런 소박하고 친근한 교장이 좋았고 전체 조회시간에 훈시가 길지 않아 더욱 마음에 들었다. 조회가 끝나고 학생들이 미처 교실로 다 들어가기도 전에 벌써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오셨다. 훈시가 길지 않은 것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얼른 일하러 가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교장선생님을 떠올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우리 학생들에게 나는 어떤 선생으로,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한창 이상과 꿈에 부풀어있는 순수한 젊은이들의 눈에 비친 내 모습과 그들의 삶에 미쳤을 영향을 생각하니 새삼 두려움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