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서

우물

by 최선화

우물 치기

고향 집 앞에는 우물이 있어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 물을 먹고살았다. 바위틈에서 솟아 나는 물이어서 물맛도 좋았고 마을 가운데 있어 사용하기도 편했다. 그 시절의 삶이 그랬듯이 아침잠에서 깨어나면 제일 먼저 신선한 물을 긷기 위해 우물가로 나오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우물은 물 그 이상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우물가에서 밤새 동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지금의 조간신문보다 더 빠른 특종으로 전해졌다. 아지매들이 물 긷는 모습을 지켜보면 그 집에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우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장하면서부터 그런 우물이 나에게 단순한 샘물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집 앞 우물이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 생명수였듯이 내 가슴속에 영혼의 샘 같은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잊고 지내온 내 존재의 샘을 인식하게 된 계기는 사춘기부터 시작된 허전함과 가슴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 때문이었다. 어느 때는 가슴에 텅 빈 구멍이 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메울 길 없어 보이던 수렁과 허무감이 결국 나로 하여금 내 존재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이끌었다.

가뭄이 들면 물이 현저히 줄어들어 동네 사람들이 밤새도록 물을 긷다 보니 한밤중에도 따르박소리가 달그락달그락 잠결에도 들려와서 내 잠든 영혼을 깨우는 것 같았다. 그러면 동네에서는 우물 치기를 했다. 우물 치는 날은 동네의 큰 행사로 아이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였다. 깨끗해 보이던 샘에 어른들이 들어가서 청소를 하기 시작하면 곧바로 흙탕물이 되었다. 쌓인 모래와 쓰레기를 치우고 이끼도 닦아내어 깨끗한 샘물이 잘 고이도록 다시 물길을 열어주었다. 처음에는 구정물이 나오다가 어느 정도 지나면 바위틈에 맑은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퐁퐁 솟아나는 투명한 샘물을 보면 얼마나 정결했던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목이 흠뻑 적셔지는 것 같은 충족감이 일었다.

내가 어떤 존재이고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어느 날부터인가 내 속에 어떤 흐름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의식적으로 감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것은 항상 나와 함께 했지만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자연스럽게 가슴에 손이 먼저 올라갔다. 속상하거나 울 때도 가슴이 아프고 저며왔다. 그러다 혼자 조용히 들여다보니 내 가슴에서 반성과 이해가 생겨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 존재의 소중한 무엇이 가슴속에 있는 것 같았다.

우물 비슷한 경험이 또 하나 있다. 초등학교 운동장 구석에는 오래된 낡은 펌프가 있었다. 아침에 교실을 청소하려고 물을 길러러 가면 펌프는 말라 있었다. 그럴 때 물을 한 바가지 붓고서 계속 펌프질을 하면 마중물로 펌프가 다시 작동되며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내 삶에 마중물 같은 존재들이 많았다. 부모님, 선생님, 위인전 이야기들... 때로는 옆집 아지매나 같은 또래 친구들도 나의 마중물이 되어 주었다. 그중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마중물은 이미 그런 샘을 발견해서 그 물을 마시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모습이 성숙하고 고결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이 전해준 마중물은 나의 세속적 찌꺼기와 피로를 씻어내는 정화수 같은 역할을 했다. 본격적으로 내 영혼의 샘을 탐색하고 돌보는 일에 몰두하자 겨우 명맥만 유지하든 물줄기가 다시 열리고 이어지는 내 가슴의 우물 치기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중물보다 더 근원적인 흐름이 내 속에 마르지 않는 샘물로 연결되어 온전함과 청정함이 샘솟는 원류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내 영혼의 샘은 나만의 성소가 되어 원하면 언제든 그곳으로 돌아가서 반성하고 깨닫고 그래서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나만의 안식처가 되었다. 맑은 생각과 감사 그리고 이해가 이곳에서 흘러나와 나의 갈증을 채워주고 내 목을 축여주며 마음껏 들이킬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나의 성소는 내가 힘들거나 지쳐있을 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을 넘어서 내 삶의 길잡이가 되고 동반자가 되고 있다.

이처럼 모두 속에 존재하는 개인적 샘은 더 큰 존재인 궁극의 바다로 이어져 개인적 존재의 궁극적 의미는 근원의 바다와 연결될 때 찾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는 너와 나라는 분리와 분별이 없어지며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도도한 생명의 바다를 이루게 된다.

어릴 적 동네 사람들의 삶이 우물을 중심으로 이어졌듯이 지금 나의 삶은 내 가슴의 샘과 흐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침에 신선한 샘물을 긷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듯이 나의 샘의 청정함을 지키고 그곳에서 감사와 고요를 나누는 것이 내 하루의 시작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유년의 기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