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추위가 며칠간 지속되고 있다. 이럴 땐 방콕 하며 고구마와 옥수수나 삶아 먹으며 게으름 부리는 게 최고의 사치다. 그래도 기분이 조금 무거웠는데 꽃을 보니 큰 위안이 되었다. ‘동지섣달 꽃 본 듯이’라고 하더니 정말 귀하다. 저렇게 여린 꽃도 추위를 물리치고 활짝 피었는데... 꽃이 전하는 위로로 온종일 행복했다.
아마도 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알레르기로 가까이하지 않거나 피하는 경우가 있어도. 사람들 속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이 있는 것 같다. 아름다움이 진실의 한 표현이기에 다들 좋아하고 반긴다. 아름다움 앞에서는 가슴이 열리고 마음이 유순해진다. 그렇다면 우리 존재가 그리고 우리의 삶이 꽃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울 수는 없을까?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삶을 종종 보기도 했고 이런 아름다움이 우리를 통해서 순간순간 드러나기도 한다.
아이의 해맑은 웃음, 청년들의 왁자지껄한 모습,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 노인이 손자를 대하는 극진한 사랑의 손길도 아름답고, 지는 노을도 아름답다. 그 앞에 아쉬움을 품고 서 있는 사람들의 순수한 표정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이렇게 많은 순간적인 아름다움이 있지만, 인품의 향기와 성숙한 모습에서 나오는 품위는 그 무엇 못지않게 아름답고, 단순한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 감동을 전한다.
하루는 학교에서 내려오는데 캐나다 단풍나무 밑에 심어진 서양 채송화를 어느 분이 뽑고 있었다. 꽃 도둑과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지만... 아주머니에게 다가가서 반만 뽑으시라고, 반만으로도 다 살아나며 금방 번질 것이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뽑던 손을 멈추고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꽃을 많이 사랑하는 분인가 봐요. 그래도 학교 물건에 손대는 것은 곤란해요. 남아나는 것이 없어요. 여러 사람이 보고 즐기면 꽃도 더 행복할 거예요. 꽃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하니 이왕 뽑은 것은 가져가서 잘 키우세요. 그러는 것이 꽃에 대한 예의겠지요.’라고 하자 아주머니가 미안한 표정으로 ‘교수님이신가 보네요’라고 답했다. 내가 ‘우리는 꽃을 사랑하는 공통점이 있네요’라며 함께 꽃 얘기를 나누며 아주머니가 평상심을 회복하도록 도왔다.
아주머니가 꽃을 뽑는 장면을 본 순간 내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뻗쳤다. 그러나 꽃을 뽑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며 그분을 나쁜 사람이라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골라서 점잖게 대할 수 있었다. 그렇게 꽃을 앞에 두고 아름답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기가 힘들었다.
꽃을 일부러 해코지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내가 복지관에서 열심히 화초를 가꾼다는 사실을 안 이용자 한 사람이 날 골탕 먹이려고 작심을 하고는 내 앞에서 화분에 있는 꽃을 뽑아서 이겨버렸다. 순간적으로 내가 마치 능멸을 당하는 것 같은 모욕감과 아픔이 일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가? 다른 일로 상처받은 사람으로 나의 도움을 바라고 찾아온 우리 이용자가 아닌가!
마음을 진정시킨 후 다가가서 말했다. ‘이제 속이 좀 편하세요? 그렇다면 저기 더 있으니 더 하세요. 꽃보다야 우리 이용자가 더 소중하지. 다 우리 이용자들을 위해서 키우는 것이니 내가 더 가져다줄까요?’라고 하자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우리를 지켜보던 다른 이용자들도 슬그머니 흩어졌다. 그 일 이후 당사자도 더는 꽃에 손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 다행스럽다. 내가 흥분하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행동에 말려든 것이 아니라, 내 중심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이 전하는 관용과 여유라는 생각이 든다.
꽃을,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꽃에 대한 예를 갖추어야 하며 비슷한 아름다움을 스스로 전해야 할 것 같다. 꽃은 언제나 자신의 본모습을 활짝 열어줌으로써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여유와 선함과 아름다움을 전하며 우리 속의 진. 선. 미를 재 기억시켜 준다. 그러니 꽃을 보면서 우리도 본모습을 기억하고 우리 속의 아름다움을 재가동시키고 키워나가야 할 것 같다.
사람은 순간순간 꽃보다 더 아름다운 인간미와 향기를 전할 수 있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표현함으로써 감동과 치유를 가져올 수 있다.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답고 더 귀한 존재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