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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화 Aug 18. 2022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유난히도 지루한 이번 여름을 내가 무탈하게 넘길 수 있도록 도운 일등공신은 냉방기기가 아닌 오래된 작은 선풍기다. 이 물건은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GOLDSTAR로, 김영란법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에 우리 학생들이 스승의 날 선물로 사준 것이다. 아마도 돈이 모자라서인지 아담한 것으로 보내주어서 보관하기도 쉽고 편리해서 지금까지 몇십 년을 잘 쓰고 있다. 특히 요즘같이 세계적인 전력난과 나의 환경친화적 성향에 딱 들어맞아서 좋다. 선물을 준 우리 학생들이 기억나서 더욱 마음에 들며 그들 모두도 이 여름을 잘 지내길 비는 마음이다. 

    


 지금은 래트로 아니면 뉴트로 감성이라고 하지만 꼭 그런 시류와는 상관없이 정감 가는 물건이 있다. 보기만 해도 마음속 깊이 잠재되어 있던 기억과 감성들이 샘솟듯 피어올라 가슴이 젖어오는 것들이 있다. 얼마 전 밀면집에서 우연히 만난 황금주전자가 그렇다. 아마도 우리 세대는 이 황금주전자와의 추억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나 삼촌들 막걸리 심부름하거나 아니면 나같이 머슴들 중참을 가져다주던 추억 속의 물건이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들고 논으로 가다 보면 주둥이로 술이 넘쳐서 하필이면 내 신발에 떨어졌다. 그래서 한 모금 빨아먹고 그래도 넘치면 또 한 모금 빨아먹다 보니 우리 머슴보다 내가 먼저 취해버렸다. 그뿐인가? 초등학교 때 당번이면 우리 반 친구들 마실 물을 모란당 샘에 가서 길러다 놓던 것도, 겨울이면 학교 숙직실에서 펄펄 끓던 결명자차를 받아와서 점심과 함께 마시던 것도 다 저 황금주전자 덕분이었다. 지금 저 주전자에는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한가득 차 있고 그때의 이야기들이 요란스럽게 끓다 못해 튀어나와서 나의 무디어져 가는 기억들을 따끔거리며 자극하고 있다.  

    

 여름에는 덥기도 하고 매일 갈아입어야 하니 웬만하면 액세서리 장식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즐겨 사용하는 브로치가 있다. 그것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를 나에게 지닌 추억의 물건이다. 어릴 적 소풍 가거나 여행을 가면 들뜬 기분에 온갖 것들에 눈이 멀어 이것저것 샀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내가 즐겨 샀던 것은 진주 반지와 목걸이고 엄마 선물은 연수정으로 만든 흰색 브로치였다. 

 내 눈에는 엄청 예뻐서 샀지만, 엄마는 항상 왜 이런 것을 샀느냐고 야단쳐서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엄마는 내가 먹고 싶은 것 사 먹고 갖고 싶은 것이나 사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았지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혹해서 사던 브로치를 내가 다시 만난 곳은 동경에서였다. 친구와 동행했던 일본 노인이 브로치를 달고 나왔는데 내 눈에 들어오자 바로 소리를 질렀다. 저건 내가 어릴 적 엄마에게 선물했던 것과 거의 유사하다고. 내 말에 일본 할머니가 바로 나에게 건네주었다.

 금속공예에 조예가 깊은 친구의 감정 결과, 지금 이렇게 만들려면 세공 값이 엄청들 것이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정교한 다이아몬드 커팅과 세팅은 요즘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 그 시절엔 인건비가 싸고 일거리도 부족해서 작은 물건 하나에도 정성을 들였던 것 같다. 그래서 골동품이 낡은 물건이 아니라 명품이 되고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장인정신과 사용한 사람들의 손때라는 역사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전자제품도 요즘 것들은 디자인도 세련되고 색상도 우아하지만 너무 약하고 비싸며 더 잘 망가진다. 소비가 미덕이고 새것이 좋은 것이며 오래된 것들은 궁상스럽고 촌티 나서 얼른 치워버려야 한다고 여기지만 과연 그럴까? 

 지금과 같은 뉴 노멀 시대에는 이런 것들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자연이 망가지고 자원이 고갈되는 이때, 옛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냉방기를 켜던 손녀가 선풍기를 켜는 나를 보며 아직도 저런 것을 왜 사용하느냐며 버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선풍기보다 더 오래된 것도 있다고 하자 뭐냐고 물었다. 

 내가 더 오래된 낡은 물건이라고 하자 깜짝 놀라며 할머니는 살아있는 백과사전이라며 버리긴 너무 아깝고 소중하다고 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노인이 그렇다고, 누구는 음식에 누구는 식물을 키우는데 지식검색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무궁무진한 산 지식과 지혜가 있는 존재들이라고. 알고 보면 그들이 삶을 통해서 길러낸 지혜와 기술이 도서관 하나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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