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읽은 글에 온종일 육두문자를 썼다고 했다. 글의 내용으로 볼 때 약간의 반성과 자책이 느껴졌다. 그 사람이 그 순간 육두문자를 쓴 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사자 외에는.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가장 적합한 표현일 수도 있고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가능하면 좋은 말로 좋게 표현하는 것이 좋겠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러니 주변에서 다른 사람이 함부로 판단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지혜를 쉽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상황 적합성이다. 그 상황에 적합하고 딱 들어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불 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좋게 말하고 곱게 말하는 것이, 듣기도 좋고 하기도 좋다. 그러나 항상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때 그 순간에 얼마나 적절했는가?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순간순간의 표현이 적절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깨어있고 지금 여기에 충실하게 집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 보면 주어진 이 순간이라는 삶의 순간들을 그냥 흘려버리며 과거나 미래라는 허상을 따라서 어딘지도 모를 곳을 떠돌게 된다.
상담하다 보면 상처받은 일은 과거에 일어났고 두려움이나 공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과거나 미래를 헤매는 동안에는 이 모두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그러나 지금 여기라는 이 순간으로 돌아오면 상처도 공포도 없는 온전한 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삶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지며 이 순간순간들로 연결된다. 이 순간을 놓치는 것은 삶의 순간이라는 귀한 선물을 놓치는 것과 같다. 이 순간이 아닌 삶은 개념이나 기억에 불과하다. 그래서 항상 깨어있으라고 한다.
불교에서 전해지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두 스님이 길을 가다가 강가에 도달해 보니 한 젊은 여성이 건너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한 스님이 망설이지 않고 젊은 여성을 업어다가 건네주었다. 그런 행위를 본 다른 스님이 길을 가며 아무리 곰곰 생각해도 그건 적절한 행동이 아니라 여겨졌다. 그래서 업어준 스님께 물었다.
‘우리 같은 구도자는 여성을 그것도 젊은 여성을 가까이하면 안 되지 않느냐?’ 그러자 다른 스님이 대답했다.
‘도반은 아직도 그 여자를 품고 있소? 나는 그 강가에 바로 내려놓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