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과 지내다 보면 많은 사람이 화를 가슴에 품고 산다는 느낌이 든다. 조그만 자극에도 버럭 화를 내고 기다렸다는 듯이 벌컥벌컥 쏟아지는 것을 보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그런 불편감 속에서 일상생활을 그럭저럭 유지하다가, 지속해서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겨 전문가의 도움이나 치료를 받거나 더 심각한 경우에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묻지 마 범죄’를 저질러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고 대중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기로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화나 분노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그렇게도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결국은 관계 형성의 욕구가 좌절되고 채워지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남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데, 시어머니, 여자친구와 아니면 내가 속한 이 사회나 조직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데 좋은 관계는커녕 무시당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느낌이 통제할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서게 되면 소위 말하는 막가파가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라도 깊은 좌절과 분노가 심각한 부정적 감정을 유발해서 상대를 괴롭히거나 아니면 본인 스스로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우리나라 고유의 심리적 질병이라고 하는 ‘한’이 바로 이런 것이다. 한까지는 아니라도 좌절과 미움이 깊이 자리 잡게 되어 개인적으로는 화병이 나고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심각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
틱낫한 스님은 ‘당신의 화나 분노를 어린아이처럼 다루어라.’라고 했다. 아이가 울면 아이 탓을 하거나 야단치기 전에 바로 달래주고 살피며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파악하려고 한다. 배가 고픈지,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옷을 입혀주어야 하는지...
화를 내고 분노하는 사람을 이렇게 자세히 살피며 욕구를 파악하고 들어주기보다는 맛 불로 더 화를 내고 큰소릴 치게 되면 결국은 사달이 나게 된다. 끓어오르는 주전자같이 뚜껑이 열려서 시끄러울 때는 드러나는 분노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상대를 탓하고 비난하기보다는 먼저 속이 다 타들어 가는 밑 마음이나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고 있는 좌절과 분노를 넘어 그 밑에 깔려 있는 본마음을 읽어주고 그것에 반응해야 한다.
‘그래, 화가 많이 났구나. 그럴 수 있지. 화가 속에 채워져 있는 것보다야 밖으로 나오는 것이 낫지, 어디 한번 들어보자. 내가 다 들어줄게. 자, 이리 와서 물부터 한잔하고 앉아서 얘기해 보자.’ 이렇게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들어주려고 마음을 여는 태도가 분노하는 사람을 감정의 폭풍우에서 벗어나게 하며 대화의 물꼬를 트게 만든다. 비록 아름답지 못한 격한 분노와 화 밑에 깔린 부드럽고 따뜻한 밑 마음 그것은 결국 사랑이고 관심이며 서로에 대한 존중과 예의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좋은 관계를 맺고 아름다운 나눔과 동행을 원하는데 그 소중한 나의 의도가 무시되고 좌절되다 보니 결국은 추함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분노는 관계 그것도 아름답고 서로에게 의미 있는 형태로 지지와 수용하는 좋은 관계에 대한 욕구에서 나온다. 이렇게 서로를 존중하며 나누는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이 좌절되었을 때 분노와 화로 표출된다. 그러니 터져 나오는 거친 겉모습보다는 상대방의 내면 감정을 잘 돌봐야 한다. 사랑이 깊을수록 더 좌절하게 되며 극단적인 행동으로 변질하기 쉽다. 그래서 그들의 겉모습만으로 이상한 사람 내지 모자라는 사람 취급할 일이 결코 아니다. 비록 미숙하고 거칠며 투박해 보인다 해도 그 밑에 오롯이 살아있는 아름다움과 선함과 진심을 먼저 알아주어야 한다.
주전자 물이 끓어서 뚜껑이 열릴 때, 주전자 뚜껑끼리 부딪치는 것처럼, 화를 화로 다스리지 말고 그 속을 들여다보라, 속이 타고 있는지, 끓고 있는지. 숭고하고 아름다운 염원이 감추어져 있는지.
사람은 자신의 진실과 진심을 알아줄 때 행복감과 감사를 느끼지만, 자신에게 소중한 진심이 곡해되고 무시되거나 하찮게 여겨질 때 심한 모욕감으로 분노하게 된다. 이것은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고 존재 자체를 무시당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예의와 애정으로 상호작용하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삶을 풍요롭고 기름지게 만들지만, 타인을 업신여기며 가볍게 업신여기는 것은, 무시당하는 타인뿐만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삶마저 먼저 망가뜨리게 된다. 바로 그 타인이 내가 될 수 있으며 본인 스스로의 삶과 가치를 무너뜨리기에.
우리는 모두 한 우물을 마시고 산다. 내가 무시한 그 우물을 결국은 나도 마시게 마련이다. 그러니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여겨야 하며 우리는 별개의 개별적인 존재일 수 없다. 타인에게 하는 행동과 태도가 바로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되며 이웃에게 행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얽혀있고 서로의 관계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일 수 있고 각자의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열려있다. 그럼에도 나를 넘어선 전체와 바로 가까이 있는 이웃에 대한 태도와 상호작용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서로를 돌보고 어여삐 여기며 친절을 베푸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자비로 이 땅을 천국과 불국토로 만들 수 있는 간단하고 상식적인 방법이다.
재미난 비유가 있다. 유난히 긴 숟가락이 있었다. 이것으로는 스스로 먹지 못한다. 천국에서는 서로에게 먹여주어 배를 채워주며 잘 살지만, 지옥에서는 혼자만 먹으려 들기에 모두가
굶주림으로 허덕인다고 한다.
참 좋은 비유다. 삶은 서로 먹여주어야 모두가 배부를 수 있다. 혼자만 먹겠다면 모두가 어려움을 겪을 처할 것이다. 내가 먹고 싶으면 먼저 다른 사람을 채워주라, 그러면 나도 채워질 것이다. 익숙하게 들어온 거룩한 분의 말씀과도 통하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