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찬가
퇴직하자마자 시작된 코로나 사태와 좀 쉬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건강 회복 등등의 이유로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 그야말로 백수로 지내고 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지만 내 경우는 말 그대로 백수다. 30년 이상 일했으면 휴식 기간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며 그동안의 일로 인한 사회적 피로를 해소하기 위한 해독 과정이 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처음으로 가져본 여유로운 시간과 자유로움이 아직도 달콤한 것을 보면, 아마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체질인가 보다. 그러나 한 번씩 사회로부터 소외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내가 경험했던 사회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고 싶고, 좋지 못한 기억들을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많다. 이제는 모든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나니 홀가분하고 마음 편해서 좋다. 여기저기에서 전해지는 소식들을 들으며 나는 이미 내 할 일을 다 했으니 니들도 고생 좀 해보라는 고소한 마음도 들지만 이보다는 이제는 일이 되어 가는 순리를 더 잘 알고 믿기에 지켜볼 뿐이다.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다 보니 아는 사람들에게 농담처럼 ‘놀면서 연금 받으니 찾아오면 밥은 사겠다.’고 했다. 이 말을 기억하고 또 내가 적적할까 봐 찾아주는 친구들도 더러 있다. 그들 중에는 말은 하지 않아도 마음에 고민이 있거나 소진 상태에서 쉼과 위로를 얻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나도 구태여 캐묻지 않고 그냥 함께 밥 먹고 차도 마시며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돌아갈 때 표정과 마음이 가벼워진 것을 보면 내 할 일을 한 것 같다. 생각나면 언제든 오라고 밥은 사겠다고 다시 농담하며 헤어진다. 엄청난 식사도 아니고 체중 관리에 지장을 주지 않을 따뜻한 밥 한 끼 정도는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하면 내 진심을 알고 기뻐하는 모습이 좋았다.
이것저것 생각다 보니 마음에 남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나를 잊고서 잘 살아간다는 것을 아니 그래서 참 고맙다. 그러나 몇몇 유난히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문자로 안부를 물으면 전화를 걸어온다. 여전히 이런저런 어려움 속에서 고민 중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필요한 조언도 해 주고 방법도 가르쳐주며 언제든 생각나면 그리고 필요하면 전화하라고 당부한다.
이들이 가장 고마워하는 점은 누군가 자신을 챙겨주고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어디에도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혼자라 여기며 깊은 소외감과 우울감에 빠져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해 주며, ‘언제든 전화해라. 나도 알아보마.’라며 위로해 주는 말이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수렁에서 벗어나서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며 전화를 해주었을 때가 가장 기뻤다.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힘들어하고 아무도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 도움을 주고 힘이 된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요즘은 이렇게 고립감 속에서 혼자서 방황하고 패배감 속에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단절시키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특히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이런 일이 노인들에게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사회적 변화에 따라 가족이 없거나 단절된 사람, 이주노동자나 탈북민, 유학생 등 사회적 아니면 자발적 배제자들이 다양한 형태로 늘어가고 있다.
요 며칠간은 연속으로 어려움을 겪던 제자가 다시 취업해서 활기차게 전화를 해오는 기쁜 소식이 전해져 마치 내 일인 것처럼 기뻤다. 그러면서 이제야 내가 어른의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는 진정한 어른이 필요하다. 당리당략에 따라 말을 바꾸는 정치인도 아니고 특정 단체를 대변하는 사람도 아닌 진정으로 사람을 중히 여기는 어른이 귀하다.
순수하게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성의껏 들어주며 마음을 열어도 비판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많은 경험을 가진 그리고 세상 물정을 좀 아는 어른들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넉넉한 품으로 이해해주며 품어주고 위로해 주어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길을 열어주는 것이 어른의 몫이다.
아마 내가 이렇게 백수로 지내면서도 만족하고 마음이 편한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적인 제약 없이 자유롭게,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 특히 젊은이들을 도와주며 길을 열어주고 새로운 희망을 갖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다. 일과 사람에 지쳐 피로한 사람에게는 휴식과 위로를 전하고, 가슴속 이야기를 안전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으로 어른다운 어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나의 백수 생활은 성공이라 여겨지며 나도 대만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