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지 않는 바보
해외에서 인턴십을 하고 있는 사촌동생과 새해를 맞아 안부를 묻는 연락 했다. 대학생을 잠시 벗어나 해외에서 일하는 게 어떤 지, 타지에서의 생활은 힘들지 않은지 물어보았다. 한국에서 십여 년이 넘게 일을 해온 나는 한국이라는 곳이 근무여건이 좋지 않다는 건 익히 잘 알고 있어서 사실 해외근무가 궁금하기도 한터였다. 답변은 예상치도 못한 게 돌아왔다.
여기는 아침에 출근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인사를 하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만 몇십 분을 보내.
일을 하다가도 궁금한 점이 생기면 주저 없이 물어볼 수도 있고, 또 인턴이라도 궁금해하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윗선이 총동원되어 설명해 주는 점이 참 다르더라고.
출근하자마자 탕비실에서 커피 한잔을 탄 후 바로 일모드로 직진하는 열혈 한국 직장인과는 달리 외국인들은 탕비실에서 만난 동료와 수다를 떠는 일이 하루의 시작이었던 게 어렴풋이 생각났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일만 하고 또 일을 다 마치지 못하면 야근을 하며 일에만 몰두하는 한국 직장인과는 달리 말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일에만 몰두하는 것일까?
해외에서의 근무를 희망하지만 이럴 때는 나의 꼰대력이 발휘하는 걸까? 회사에서는 일을 해야지 수다 떠는 사람들을 잠시나마 이해 못 했던 내가 떠올랐다. 회사는 과연 직장인에게 어떤 곳이어야 할까?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한국은 급성장을 이뤘을지 모른다. 개인이 조직을 위해 희생하는 방식을 택한 것 말이다. 12년 공부해 온 학교에서도 수업시간엔 질문을 하지 않는다. 궁금한 점이 생기더라도 별도로 표시해 놓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 혹은 자율학습 시간에 따로 선생님께 물어본다. 질문을 하면 나가야 할 진도를 지연시키고, 나만 모르는 점이라 같은 반 친구들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으며, 선생님의 수업시간을 방해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배웠다.
그러나 서양식 학습법은 개인이 얼마만큼 잘 따라오고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진도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 어떠한 질문이라도 손을 들고 이야기한다. 선생님 또한 학생 한 명을 이해시키기 위해 예시를 들거나 다른 방식을 통해서 시간을 할애해 설명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혹시라도 이해 못 한 다른 학생들을 위해 손들어 준 용기를 칭찬하며 앞으로도 모르는 건 넘어가지 말라 알려준다. 바보 같은 질문보다 질문하지 않는 바보가 더 잘못됐다 생각한다.
수십 년 간 한국에서 자라온 한국인으로서 질문하는 건 잘못됐다 배우고 나 자신을 드러내는 건 옳지 않다 배웠다. 회사에서도 소위 말해 '까라면 까'가 통하는 것이다. "위에서 하라는 데 뭔 말이 많아?"라는 단호함에 더 이상 질문할 수도 의견을 낼 수도 없을 것이다. 개인의 의견과 능력에 좀 더 초점을 둔 외국생활이 부럽기만 하다.
어찌 보면 직장인으로 일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잠시나마 그런 문화를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여 년이 넘게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까라면 까고, 위에서 뭐라 할 거는 아예 시도도 하지 말자는 무발전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서 그녀의 해외 인턴십이 참 부럽기만 하다.
인턴의 시각으로 본 그녀의 해외인턴 생활 경험담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내일은 회사로 가서 인턴에게 안부를 묻고 먼저 다가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질문이 있다면, '인턴은 아직 그런 거 몰라도 돼.'라며 꼰대력을 발휘하기보다는 내가 아는 방법을 총동원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때는 궁금한 게 산더미였던 인턴이었을 테고, 그런 질문에 답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했을 테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