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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Aug 13. 2022

닷새 간의 짧은 이별

TV가 고장 났습니다. A/S 상담원은 2주 후에나 전문 기사가 수리하러 올 수 있다 하네요. 좋아하는 영화, 야구와 축구경기를 2주 동안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저와 남편은 망연자실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2주 간 TV 없이 살아야 한다면 이번 기회에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TV 없이 지내기를 경험해 보자고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이미 TV에 중독된 우리 부부가 어떻게 이 극한의 기간을 몇 일이나 버텨낼지 궁금했습니다.


TV가 고장 난 첫째 날의 저녁 분위기는 낯설었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보통은 저녁시간에 온 가족이 시끌벅적하게 두산 야구팀을 응원하며 휴식을 취하고 아이가 잠든 후에는 남편과 함께 영화 한편씩을 보곤 했는데요, 이 날은 영상과 소리가 없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 각자의 방에 들어가 무언가를 했습니다. 살짝 훔쳐보니 남편은 노트북으로 야구경기를 보고 딸은 방에서 줌으로 친구와 만나고 있더군요. 저도 평소와는 달리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책도 좀 들춰보고 하며 나만의 시간을 가졌지요.


TV가 멈춘 둘째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늘 보던 경제채널을 보지 못하니 아침 루틴 하나가 빠진 것 같아서 허전했습니다. 저녁시간에 남편은 어제처럼 방에 들어가 책을 보고, 딸은 숙제를 합니다. 퇴근 후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가 심심해진 저는 남편과 수다라도 떨려고 방문을 두드렸죠. 왠걸요, 남편이 그만 뒹굴거리고 책이나 보라고 저를 밀어내네요. 오호! 퇴근 후 TV에 빨려 들어갈 듯 꼭 붙어있던 남편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대단한 변화였습니다.


TV가 나오지 않은 셋째 날 저녁, 남편은 책 보기와 멍 때리기를 반복합니다. 저는 회사에서 못다 한 일을 펼쳐놓았고 딸은 방에서 춤추기 연습을 하네요. 멍 때리기를 하던 남편이 집에 연결하지 않은 작은 TV를 켜보자고 합니다. 뭔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안 보니까 이상하다고, 뭘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요. 조금만 참아보자고 했지만, 사실 저도 남편과 같은 느낌이라 살짝 유혹에 넘어갈 뻔했어요. 특히 잠이 안 오는 밤에 영화를 못 보는 게 많이 아쉬워서 더 그랬지요. TV 금단 현상이 슬슬 나오는 것 같았지만 꾹 참았습니다.


TV가 멈춘 넷째 날, 금요일입니다. 주말에 적어도 두 편의 영화를 보는 남편에게 작은 TV를 연결하자는 유혹의 손길이 다시 뻗치기 딱 좋은, 가장 위험한 날이죠. 일단 야구경기는 노트북으로 봤습니다. 금요일 저녁마다 즐겨보는 드라마는 나중에 다시 보기를 이용하기로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잘 넘겼습니다.


TV 없이 지내기 다섯째 날, 토요일입니다. 저녁식사 후 놀고 있는 작은 TV를 연결했습니다. 주말 드라마를 꼭 보겠다는 남편의 강력한 주장에 저도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숟가락을 얹었지요. 그리고 온 가족이 모여 야구경기를 보며 신나게 으쌰 으쌰 했습니다. 


이렇게 TV 없이 보내기는 닷새만에 끝났습니다. TV가 없으니 영화와 스포츠 경기 보기로만 시간을 보내던 저녁시간이 책 읽기, 멍 때리기, 자기만의 시간 갖기 등으로 다채로워지더군요. 2주 내내 TV 안보기를 유지했다면 TV 아닌 다른 수단으로 가족이 함께 즐기는 방법을 이것저것 시도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습니다. 이런 기회가 또 올 것 같지는 않지만 닷새동안의 경험을 기억하고, 앞으로는 보다 풍요로운 저녁시간을 위해 영화와 스포츠 경기를 보는 시간을 조금 줄여 볼 생각이에요. 무엇부터 시작하는게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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