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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Oct 08. 2022

여행이 자유로워질 때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작은 사건

우리 부부의 여행 스타일은 완전 반대이다. 귀한 시간을 내어 떠나는 여행이니 사전에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고 그대로 실행에 옮기려 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무계획 여행주의자'이다. 떠나는 시간과 되돌아오는 시간만 정해두고 나머지 시간은 비워둔다. 내용은 현지에 가서 정하는 거다.


지난 5월 가족여행은 차편과 숙소 예약, 일정 짜기, 짐 싸기까지 몽땅 내가 준비했다. 두 달 전 여행보다 더 재밌게 보내자는 딸과의 약속 때문에 맛집과 놀러 갈 곳도 그 전보다 더 심사숙고해서 정했다. 때문에 떠나는 날 아침에 몹시 피곤했지만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기만 하면 모든 게 완벽해 보였기에 기대 속에 출발했다.


첫 일정은 부산 기차역 앞 차이나타운 만두집 방문이다. 기차에서 내리자 마자 달려갔는데 11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만두집 앞에는 이미 대기줄이 백만 미터나 되었다. 갑자기 남편이 2시간 넘게 기차에서 마스크 때문에 턱턱 막힌 숨이 그 대기줄을 보니 한번 더 막힌다며 다른 식당으로 가자고 하며 방향을 튼다. 계획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고, 몇 주 전부터 그 집에서 만두 기대했고, 아까 전에 먹기로 약속했던 나에게,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인가! 기분이 몹시 상했다.


"싫어, 여기서 먹어. 여기서 먹기로 했잖아"


부산역 앞 차이나타운 입구에서 나는 화가 나서 방방 뛰었다. 먹기로 계획한 거잖아, 아까 기차에서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 좋다고 했잖아, 여행 준비하느라 지친 마누라가 가고 싶은 식당에 한번 가는 게 그렇게 어렵냐, 줄 서서 좀 기다리면 안되냐며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사정이 안되면 바꿀 수도 있는 거지, 꼭 그렇게 계획한 걸 지켜야 해? 놀러와서 뭘 그리 지키고 말고를 해!."


남편도 지지 않았다. 맛집을 앞에 두고 나는 오른쪽으로 남편은 왼쪽으로 몸을 휘돌려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중간에 낀 딸은 어느 쪽을 따라가야 할지 몰라 "이럴 거면 여행 왜 왔어?" 라며 울먹이며 발을 동동 구른다.


우리 둘은 딸의 울먹임에 가던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왔다. 우는 딸을 달래서 맛집의 옆집으로 들어가 만두와 자장면을 시켰다. 배가 무척 고팠지만 단 하나의 만두도 입에 넣기 싫었다.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남편에게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배고픔이 분노를 이기지는 못하는지라 10분 정도 지났을 즈음에 물만두 두 개를 살며시 입에 넣었다. 맛이 괜찮다. 아니 훌륭하다. 맛집의 옆집 만두가 이 정도이니 맛집 만두는 얼마나 맛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화가 또 날 법도 했지만, 허기가 좀 달래져서 인지 마음이 누그러졌다. 슬며시 옆을 보니 남편과 딸도 언짢은 분위기에 그 좋아하는 자장면을 반이나 남겼다.


불같았던 화는 조금 누그러졌지만 아직 서로에게 말을 걸기에는 어색하여 딸에게 아빠한테 커피 마실 거냐고 물어보라고 했다. 딸은 아빠가 해운대 거리에 있는 에스프레소 바에 가잔다고 전한다. 알았어, 택시 잡자.


에스프레소 바의 커피 맛이 썩 좋지는 않지만 분위기 하나는 끝내줬다. 잔잔히 흐르는 재즈음악과 진한 커피 향에 마음이 한번 더 녹아내렸다. 남편에게 버럭했던 게 미안해서 제일 맛있게 생긴 케이크 두 조각과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이유없이 날벼락을 맞은 딸에게도 평소 시켜주지 않던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스무디를 사주고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누가 먼저 말을 걸지 어색한 눈치게임이 시작된 가운데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남편이 딸의 입에 케이크를 쏙 넣어주며 씨익 웃었다. 나도 스무디 위의 아이스크림을 떠서 딸에 권하며 딸의 볼을 꼬집었다. '왜들 이러시나'라는 표정을 한 딸이 테이블 뒤로 몸을 쓰윽 빼고 의자를 엉덩이에 붙인 엉거주춤한 자세로 내 반대편으로 옮겨앉는다. 둘이 붙어 앉으라는 소리다.


내가 의자를 남편 쪽으로 조금 움직이면서, 아까 화 많이 내서 미안하다고 먼저 말을 건넸다.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이 바로 받아서 이야기를 한다. 좀 편하게 가자, 여행인데, 쉬러 온 건데, 여유를 느끼러 떠났는데, 계획 못 지키면 안 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자고 한다. 백번 맞는 이야기이다.


나는 늘 꼼꼼히 여행 준비를 하느라 피곤했고 계획대로 지키려고 신경을 곤두세운 채 여행을 했다. 여행 전의 설렘은 뒤로하고 어긋나지 않게 일정을 유지하려고 긴장했고, 일정대로 착착 진행될 때마다 으쓱했다. 그때마다 뭔가 중요한 일을 해낸 것처럼 보람이 있었다. 남편과 딸은 재미없고 지루했어도 내가 짜증을 낼까 봐 티를 내지 않았다고 했고 그걸 모르는 나는 잘했다고 우쭐해하고 있었던 거다. 여행의 여유, 쉼을 즐긴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일거리를 해치운 것에 만족했던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별 의미없는 일인데 그게 그렇게 좋았다. 가족들이 편한 여행을 하지 못하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했다.


커피를 다 마실 때 즈음 우리 가족은 내가 짰던 이후 일정은 다 무시하고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전망대에 올라가는 대신 남편의 의견에 따라 기찻길 산책을 느긋하게 하고 딸의 요구에 동백섬을 세 바퀴나 돌았다. 밥 먹을 곳은 광안대교 야경이 좋다고 광고하는 길가의 파스타집으로 정하고, 그곳에서 예정에 없던 와인도 한 잔씩 했다. 생각을 바꾸니 순조롭게 여행지 방문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내가 보였던 짜증과 날카로움이 사라졌다. 늘 새벽녘에 두세 번 눈을 뜨던 여행지에서의 첫 밤과는 달리 그날 밤은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잤다.

 

그날 이후 나는 우연을 만나는 시간을 여행이라고 정의 내리기로 했다. 누군가는 여행을 자유로움이라고 하던데,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겠지만 느슨하게, 여유롭게, 공간을 남겨두고 여행하면서 우연한 일을 즐기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 연휴에 가기로 한 경주여행은 일정을 짜지 않았다. 경주에 도착해서 무엇을 할지 정할 것이다. 이제야 기대와 설렘이 가슴에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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