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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사탕 Aug 10. 2023

무사히 지나가게 하옵소서

사상 초유의 태풍 '카눈'이 북상 중이다.

생전 처음 보는 경로와 무시무시한 강도에 아이들의 학교와 어린이집은 안전을 위해 가정보육을 선택했다. 전날부터 인근 일본의 태풍 후기들을 보며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아이들은 각자의 기관이 아닌 하루종일 엄마와 함께 집에 있는다는 생각에 밤이 늦도록 잠들지 않고 신이 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바라본 하늘의 얼굴은 다소 밝아 보였다.

아직 한반도에 도착하지 않았지만 제주도 및 남부 지방은 벌써부터 태풍의 선전포고를 받고 있었다.


그에 반해 우리 동네는 귀여운 보슬비 수준.

TV속 재난방송에서 비치는 소란들을 송구스럽게도 다른 나라의 사건으로 여길 뻔했다.

오전이 지나면서 조금씩 굵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우리 집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자며 옥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원래 대청소는 비 올 때 하는 것이라고,

갖가지 화분들을 안전한 곳에 옮기고 아이들 장난감, 의자 등을 치우다 보니 어느새 바닥 청소까지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수도꼭지를 틀고 콸꽐 나오는 물줄기를 사용하겠으나 그만큼의 비가 하늘에서 쏟아주니 홀딱 젖는 대가를 치르면서 묵은 때를 씻었다.


한반도를 수직으로 치고 올라오는 이번 태풍은 얼마나 험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 걱정하는 나와는 달리 엄마를 따라 나온 꼬맹이는 비 맞으며 정리하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점차 거세지는 바람에 서둘러 마무리를 하고 들어오는데 아이는 자신의 슬리퍼도 함께 깨끗이 만들어 주겠다며 해맑은 얼굴로 장독대 한편에 오빠 것과 자신의 빨간 슬리퍼를 비스듬히 세워 놓는다.



집 안으로 들어와 뉴스를 다시 틀어 놓았다.

점심 무렵이 되었으나 느지막하게 아점으로 때웠던 터라 찐 옥수수와 잼을 바른 식빵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며 상황을 예의주시 했다.

이미 아래 지방에서는 태풍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각종 피해 장면이 TV 속에서 실시간으로 보고되고 있었다.


태어나서 '태풍은 무섭다'는 말만 들어왔던 아이들은 옥수수를 입에 물고선 그 험악함을 보며 은근히 놀란 눈치다. 동시에 비바람 그 이상으로 후려치는 창 밖의 소리들. 분명 낮임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열 엄두조차 내기 힘들어진다.




낮잠을 자기 위해 방에 먼저 들어와 있었던 둘째는 뭐가 그리 분주한 지 내가 들어가도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나: 따님~ 뭐 해?

아이: 태풍에 소중한 것들이 날아가면 안 되니까 보호하고 있어요.

나: 어떻게 하고 싶은데?

아이: 나의 소중한 인형들을 전부 안아주고 잘 거예요.


기껏해야 자신이 동생이라 부르며 늘 함께 해왔던 토끼인형 정도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온 집안의 모든 인형들을 전부 가져와서 본인의 잠자리에 쌓고 있었다. 하물며 평소에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들까지 말이다.


나: 이건 네가 싫어하는 건데? 지난번에 버려도 좋다고 했잖아.

아이: 조금 덜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바람에 날라가면 다칠 수 있어요.


만 4세 아이 입에서 나온 언어 치고는 꽤나 고급스럽고 생각이 깊은 말이었다.


그렇다.

이 쪼꼬만 한 아이는 모두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싫어해서 며칠 전 버려도 된다고 이야기했던 누더기 인형 일지라도 아무도 낙오 없이 살았으면 하는 그 마음. 내심 엄마 입장에서는 감동이었다.


'하나님,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 안 다치게 해 주세요~

햇님이 와라 해주세요~'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꼭 감은채 모두가 무사하길 바라는 기도를 한다. 그리고 결국 본인의 짧은 두 팔로 모두 안고 잠이 들었다.

솔직히 인형으로 만든 푹신한 침대 위에서 불편하게 엎드려 자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기특함에 오늘도 나는 너를 배우게 된다.


생명은 누구나 소중하다.

그리고 아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만 아니면 돼"


나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농담처럼 던지는 이 한마디가 은연중에 떠올랐다.

무의식적으로 나와 내 가족의 안위만 생각했던 이기적인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각자, 개인의 선한 마음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해서라도 좋은 결과를 만들면 된다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는 집어치우자.


얼마 전 많은 비로 수많은 사람들이 집, 건강 등 많은 것들을 잃고 힘들어했다. 그로부터 복구가 채 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못돼 먹은 태풍이 양심 없는 모양새로 길을 만들어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다. 부디 우리 딸의 간절한 마음처럼 모두가 함께 살아나가는, 더 이상 낙오나 큰 상처 없이 이번 태풍이 재빨리 지나가기를 나 또한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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