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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늘 신호를 보낸다

네 번째 조각

by 스윗대디

만약 이 세상이 우연의 산물이라면, 인생을 살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거시적 차원의 존재 이유가 없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단순한 소모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조차 쓸데 없는 감정노동에 불과해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목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체 뭘 위해서?'라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사는 우주는 단순한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정교하게 짜여 있습니다.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 23.5도, 지구 산소 농도 21%. 우주는 마치 우리의 존재를 위해 일부러 설계된 것처럼 보입니다. 자유의지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모든 행동은 결국, ‘생존’과 ‘번식’이라는 생물학적 목적에 어떻게든 연결됩니다.


자세히는 몰라도,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 삶에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를 만들어낸 존재(편의상 '신'이라 하겠습니다)도 있을 것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머무는 세상도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논리로 신과 초월적 세계를 믿게 되었고, 그 세계와의 소통을 경험하는 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크고 본질적인 목표가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는 '기도' '응답'이라는 형태로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거나, '응답'을 받았다는 말을 당연한 듯했지만, 아쉽게도 저는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신은 저에게 대답하지 않았고, 저는 결국 신과 소통하는 다른 길을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신을 찾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다른 종교의 가르침도 공부해 보고, 명상도 해보고, 철학심리학도 꾸준히 공부했습니다. 우연처럼 찾아오는 의미 있는 순간들을 곱씹으며 그 안에 답이 있지 않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신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은 제가 그동안 배우고 기대하던 방식으로 소통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신이 보내는 신호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그것도 너무나 담백하고 명확한 방식으로 말이죠.





동시성(Synchronicity)


'동시성'이라는 현상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동시성은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이 창시한 개념으로, '의미심장한 우연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것처럼 의미를 가질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신호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융은 이 현상을 단순한 우연이나 미신이 아닌 심리학적 원리로 보았으며, 논문까지 발표할 정도로 진지하게 연구했습니다.


• 어떤 사람을 떠올리자마자 갑자기 그 사람에게서 연락이 옵니다.
• 오랫동안 고민하던 문제의 답이 우연히 펼친 책에서 나타납니다.
•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특정 숫자가 계속 눈앞에 나타납니다.
• 어젯밤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이 다음 날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됩니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이런 순간들, 단순한 '우연'일까요? 아니면 우리를 향해 누군가 보내는 '신호'일까요?


융은 이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연결된 '신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우리가 어떤 강한 의도를 가지고 있을 때, 혹은 무의식적으로 어떤 질문을 품고 있을 때, 그에 대한 답이 '우연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동시성이라는 것입니다. 동시성을 우리 삶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질서’의 일부라고 본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시성은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것은 정말 누군가 보내는 신호일까요?





너구리와 흰나비


'너구리'는 16년 동안 저와 함께한 강아지의 이름입니다. 철없던 20대 시절부터 가장이 되기까지, 너구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저의 안식처가 되어준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너구리가 세상을 떠나던 날, 저는 너구리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이 잠든 사이, 너구리는 텅 빈 거실에서 홀로 조용히 무지개다리를 건넜습니다.


마지막 순간 함께하지 못했다는 미안함, 그리고 무엇보다 두 번 다시 너구리를 만날 수 없다는 상실감에 오랜 기간 슬프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물음이 들었습니다.



너구리는 정말 사라진 걸까? 아니면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걸까?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던 중,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박사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사후생』(Elisabeth Kübler-Ross, on Life after Death, 1991)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육체와 영혼의 관계를 '고치와 나비'에 비유하며, 육체가 사라지더라도 영혼은 다른 형태로 계속 존재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영혼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너구리와 어떤 형태로든 다시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비이성적인 생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너구리가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한다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만한 신호를 보내 달라고.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른채, 절실함을 담아 몇 번이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를 한 후부터 매일같이 흰나비를 마주쳤습니다.

어디를 가든, 어떤 상황이든, 적어도 한 마리씩은 제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고속도로 위에서도, 지하주차장에서도, 심지어는 창문이 닫힌 실내에서까지도, 나비가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서 흰나비를 마주쳤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우연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너구리를 떠올리며 감정이 움직일 때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흰나비가 나타나는 순간이 반복되면서, 저는 더 이상 그것을 우연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흰나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너구리를 떠올리며 운전할 때면, 시야에 들어오는 자동차 번호판에 '092'라는 숫자(영혼을 상징하는 '영' + 너구리의 애칭 '구리')가 자꾸 눈에 띄었습니다. 너구리에 대한 감정이 보다 깊어지는 날에는 출근길 한 시간 동안 '092'가 쓰여진 번호판을 20번 넘게 본 적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요, 아니면 누군가로부터의 '신호'였을까요?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은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는 그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너구리는 떠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제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흰나비의 모습으로, 숫자의 형태로, 그리고 제가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신은 늘 신호를 보낸다


너구리 사건 이후, 저는 이 신기한 현상을 좀 더 테스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신과의 소통'에 대한 힌트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신호를 보내 달라고 진심으로 기도한 뒤, 일상 속에 나타나는 신호가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가끔 '내가 미쳤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흥미로운 마음이 더 컸습니다.


어느 날, 매우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앞으로의 인생을 좌우하게 될 아주 중대한 결정의 순간이었습니다. 정말 확실한 신호가 필요했기에, 이번에는 좀 더 복잡한 신호를 요구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날 아침 출근하기 직전,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 자동차 번호판에서 ‘333’을 정확히 세 번 보고, ‘3333’을 딱 한 번 보게 해 주세요.”



너무 구체적일뿐 아니라 확률적으로도 일어나기 매우 희박한 요구였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날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신호가 정말 나타난다면, 그 결정을 망설임 없이 내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 그날 오전 출근길, 도로 위에서 번호판 ‘333’을 두 번 보았습니다.
• 차에서 내린 후 사무실 앞에서 번호판 '333'을 한 번 더 보았습니다.
• 퇴근길 도로 위에서 번호판 '3333'을 딱 한 번 보았습니다.


세 번의 '333'과 한 번의 '3333'.

정확히 제가 요구한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결정을 내렸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날 내린 결정이 제 인생에서 가장 감사한 선택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제가 살면서 내린 결정 중 가장 단순하고 생각 없이 내린 결정이었는데도 말이죠.


익숙한 일상의 풍경 속에, 스쳐 지나가는 숫자 속에, 카페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노래 가사 속에 누군가 우리를 향해 보내는 신호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 신적인 존재가 보낸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의미를 부여했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사실, 그것을 신호로 받아들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이 움직였다는 사실뿐입니다.


별개의 사건들이 맞물려 하나의 의미로 다가오는 순간 신호가 탄생합니다. 간절한 순간 나타나 때로는 마음의 위로가, 때로는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줍니다. 우리 인생에 보여지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음을 알려줍니다.


신은 우리에게 늘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눈앞에 펼쳐질 길을 알려주듯,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방식으로 말이죠.


그 신호를 알아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스쳐 지나갈 것인가는 오롯이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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